믿음을 지킨 신앙과 유혹에 넘어간 신앙(계2:12~17)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이러한 동네에 교회를 세우시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 세상에 죄인들이 많이 있는 한 교회는 결코 고객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 있을지라도 세상의 풍조를 좇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모이는 사람들의 성격을 반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부천에 있는 혜린교회를 만나게 하셨다. 부모나 자녀가 연약하거나 아프다고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만약에 교회가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는 거룩한 차별성이 없다면 교회는 사교클럽은 될 수 있을지라도 거룩한 교회는 아니다. ‘차별되었다’라는 말은 “거룩하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으려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화를 받기 위해 기도하고 예배하라고 하셨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모든 신앙인들은 복을 사모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하셨을까?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을 만들기 위함이다. 오염되고 더러워진 마음의 그릇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고난을 주신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 시작하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에 나타나는 것을 비로소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안 주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을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응답을 갈망하기보다 응답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었는가를 하나님의 시선에서 정밀감사를 해야 한다.
겉모습만 신앙인, 말로만 신앙인일 뿐 아직 마음 중심은 변화된 것이 없다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신앙일 뿐이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른 것이다. “밤새 놀았더니 기쁘더라, 밤새 도박을 했더니 기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슬픔을 당해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 기쁨이 있다, 힘은 들어도 마음은 기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의 비위를 맞추고 즐겁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의 힘센 것들보다 모든 것의 정점에 서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종 노릇 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거룩함을 유지할 수는 없다. 교회가 거룩을 유지해야할 이유는 세상을 부러워서 본받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분들이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 문제로 순교를 당했고, 공산치하에서는 믿음을 지키려고 순교를 당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진다.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헌법이 보장한 자유이다(헌법 제20조). 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살려는 사람은 불이익을 받고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이 세상은 어느 시대나 버가모와 같은 곳이다. 어디를 가든지 사탄이 지배하고 있다. 사탄이 ① 문화를 지배하고, ② 돈 문화를 지배하고 있기에, 세상을 쫓아다가 보면 사탄을 쫓아가게 된다.
버가모와 같은 세상에서 오직 말씀과 성령을 붙들고 정직과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세상 안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버가모 지역은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들이 가득했다.
버가모 지역은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에베소와 서머나와 함께 소위 소아시아의 3대 도시로 일컬어지는 도시로서, 로마가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는데 매우 중요한 행정수도였다.
그렇기에 버가모는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게 되었고, 교육과 학문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특히 황제숭배를 더 잘하기 위해 세운 신전이 3개나 있었다고 한다.
버가모 교회는 엄청난 우상들과 악한 영들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를 당할 만큼 엄청난 고난과 박해가 있는 상황 속에서 수많은 도전과 위협을 받았지만,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때문에의 믿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이다. ‘때문에의 믿음’은 어린 아이와 같은 초보적인 믿음이다. 아이들은 ‘때문에’ 좋아하고, 만족하고, 기뻐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깨진 병조각을 주어서 매일 면도를 하며 살아서 죽음의 수용소를 나왔던 외과의사 빅터 프랭클은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이다”라고 했다.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서히 잘못된 가치관에 물들어버린다. 익숙해지면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그것이 옳은 것처럼 여긴다.
버가모 교회는 “환난 중에서도 믿음을 지킨 확고부동한 믿음”을 소유한 교회였다. 엄청난 박해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교회였지만, 달콤한 유혹에는 쉽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버가모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이중적인 공격을 받은 교회였다. ① 황제숭배를 요구하며 직접적으로 공격함으로 순교자까지 배출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핍박으로는 믿음이 무너지지 않았다.
버가모 교회의 믿음이 무너지도록 만든 것은 “소리 없는 동화작용”이었다. ② 세상은 어느 순간부터 박해의 손길을 거두고 화해의 제스처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주 사탄의 고단수 정책이었다.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고단수 화해 전술에 말려들어서 심하게 오염되고 부패한 상태에 놓였다. 적이 친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더 이상 경계를 하지 않고 같이 놀다가 결국 넘어지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점은 주께서 나타나신 모습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셨다. 전투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주께서 좌우에 날선 검을 들고 나타나신 것은 교회를 괴롭히는 원수들과 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미 버가모 교회는 원수 같은 것이 없어졌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같아졌기 때문이다.
처음에 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싸우는 교회였다. 세상의 직접적인 공격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지금은 싸우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가모 교회는 달콤한 세상의 유혹에 미혹되어 말씀의 능력을 포기한 교회였다. 칼을 가지고 있지만 좌우에 날선 검이 아니라 무딘 검이었다. 이미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한 상태였던 것이다.
버가모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신앙을 잘 지켰던 교회였다. 그러나 육신적인 어려움이 없어지자 신앙이 변해버렸다. 세상과 교회가 다를 것이 없어졌기에 싸우러 오셨다.
주께서 “내 입의 검으로” 싸우려고 하는 대상은 “교회 안에 있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는 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을 의미한다.
당시 버가모는 아주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고, 장서 20만권을 자랑하는 도서관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소유한 애굽왕이 세계 유일한 종이인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시켰다.
그때 버가모는 종이가 없어 책을 만들 수 없게 되자 송아지 가죽이나 양 가죽을 얇게 가공해서 “양피지”를 만들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방의 수도로서 행정중심도시였다. 공무원들과 군인들이 많았고, 로마가 파송한 총독이 있었다. 총독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통수권이 없는 총독과 통수권을 가진 총독이 있었다.
‘통수권을 가진 총독’이란 “주민의 재판권과 생사까지도 관할하는 권력을 가진 총독”을 말한다. 어떤 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는 절대 권세를 가진 총독이었다.
버가모에 로마가 파송했던 총독은 “절대권력을 가졌던 총독”이었다. 절대 권력자들과 결탁된 우상숭배자들이 교회를 핍박했다.
주께서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셨다(14). 이것은 버가모 교회의 잘못이 적다는 뜻이 아니다. 버가모 교회의 많은 문제는 이렇게 두어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는 외적인 핍박은 이겨 냈지만, 속으로 파고드는 유혹은 이겨내지 못했다. ① 지도 계층의 타락이었고, ② 그 결과로 인해 교인들 가운데 일어나게 된 방종이었다.
‘발람의 교훈’은 무엇일까? 발람은 히브리인이 아닌 선지자였다. 히브리인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영감이 임한 선지자였으니까 얼마나 귀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냐?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돈을 더 사랑했다. 발람은 돈을 위해 은사를 팔아먹는 대표적인 선지자였다. ‘발람의 교훈’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버릴 수 있다는 가치관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느냐? 황금만능주의와 쾌락주의에서 돌아서서 회개하라고 하셨다. 우리의 진정한 자산은 “부동산이 아니라 변질되지 않은 믿음”이다.
돈을 받고 광야에서 훈련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해를 끼쳤던 선지자가 발람이었다. 발람의 계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으로 인해 염병으로 죽임당했다(2만4천명).
발람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있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돈 욕심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올무를 놓아서 넘어지도록 만들었다. 결국 칼에 죽임을 당했다(삿13:22).
어려운 핍박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더 열심히 신앙을 지킨다. 그러나 신앙의 박해가 없어지고 편안한 삶이 오게 되면 신앙의 경계를 풀고 정욕적인 삶에 익숙해진다.
신앙의 위기는 “어려운 핍박을 받을 때보다 생활이 안정되었을 때”이다. 누구든지 어려울 때는 긴장을 하지만 어려움이 해결되고 나름대로 생활이 안정되면 조금씩 신앙자세가 무너진다.
버가모 교회는 외부적인 핍박과 고통은 믿음으로 여겨냈지만 결국 편안한 삶이 주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믿음이 변질되었다.
한꺼번에 몰려오는 핍박은 이겨 냈지만, 지속적으로 조금씩 피고 드는 죄의 유혹은 이겨내지 못하고, 발람의 교훈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의 죄를 범하는 세상화 되어 버렸다.
또한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부러 방종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이야말로 자유롭게 성경을 잘 안다고 외치며 자기 멋대로 죄를 지었다.
니골라당 사람들은 “영혼만 깨끗하면 되니, 육체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주장했다. 요즘 구원파와 조금 비슷하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 무서운 것은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는 성도이지만, 세상 사람들 속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되었다.
사탄의 물타기 작전에 속아서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하나님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을 잃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돈을 사랑하여 발람의 교훈을 수용하고, 니골라당들이 자유분방한 삶을 강조하면 신실한 성도들도 분별력을 잃고 넘어지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구제불능이 되고 만다.
예배를 드릴 때만 말씀을 수용하고, 나머지의 삶에서는 말씀의 영향력을 무시해버리는 것이 ‘니골라당’이다. 예배만 충실하게 참석하고 삶의 변화와 성숙이 없다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발람처럼 세상 욕심에 미혹되어 나귀가 소리를 쳐야 알아듣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소리에 삶을 돌이키지 않으면 칼을 든 주를 만난다.
주께서는 발람의 교훈에 미혹되어 부패한 교회에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가 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감추었던 만나’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 법궤안에 넣어 보관하게 하셨으나 나중에 만나 항아리가 없어졌다.
‘감추인 만나’는 “세속주의에 물들지 않고 끝까지 깨끗한 신앙을 지키는 자는 지성소에 보관된 양식을 먹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자는 굶어 죽는 법이 없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일지라도 말씀을 깨달은 자들은 먹이시고 입히신다.
우리는 무엇으로 하루를 살고 있느냐? 이 세상의 먹는 양식이나 취미, 재미로 하루를 살고 있다면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세상이 망할 때 함께 망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로 산다. 주께서 공급하시는 만나가 “말씀의 깨달음”이다. 말씀의 뒷면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의 기쁨으로 하루를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맛을 아느냐? 무엇이 내게 주어질 때 기쁘냐? 돈이 주어질 때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맛을 아느냐?
주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옛날에 ‘흰 돌’은 어느 집에 들어올 때 주는 패스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기는 자에게 암행어사 마패처럼 표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냥 흰돌이 아니고, 이름이 새겨진 돌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돌을 받은 사람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의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온갖 핍박과 고통을 이겨낼 때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핍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은근히 찾아오는 유혹이다. 삶이 어려울 때보다 평안할 때 위기는 찾아오는 것이다. 돈과 명에 앞에 신앙양심을 팔지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다.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뒤돌아서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성취를 볼 수 있다.
버가모 교회는 혹독한 핍박 앞에서는 순교적 정신으로 싸워 이겼으나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 앞에서는 넘어졌다. 사탄의 공격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성령의 사람들이 사탄의 표적이다.
핍박이든지 달콤한 유혹이든지 분별력을 소유한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요셉처럼 그 자리를 떠나든지, 다니엘처럼 당당하게 멈추지 않고 계속 기도함으로 승리해야 한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는 성도이지만, 주중에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생활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협주의와 혼합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이다. 세상은 자꾸만 합쳐 놓으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모세 오경에 보면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경멸하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섞으면 섞을수록 변질된다. 기독교의 생명은 혼잡되지 않는 것이다.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붙드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신다.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기뻐하신다(호9:10).
십자가의 길에는 타협이나 절충이 없었다. 성경 어디에도 신앙생활을 쉽게 하라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다.
세상과 신앙에 양다리를 걸친 신앙을 회개하지 않으면 검을 들고 찾아오셔서 싸우시겠다고 하셨다.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으면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사람이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선진국들도 보면 국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성도들의 신앙이 뜨거웠고, 교회들이 부흥했으나 삶이 부유해지니까 신앙의 열정이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