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과 궁핍을 이겨낸 부요한 사람들(계2:8~11)
“유치원생의 머리는 느낌표이고, 대학원생의 머리는 마침표”라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뭐든지 알고 싶어하기에 성장과 발전이 있다. 그러나 대학원생은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D. L.무디가 미국의 한 도시에서 전도대회를 열고 있었을 때이다. 어느 날 그 도시의 신문에 <무디 선생은 교만한 전도자>란 기사가 실렸다. 기도할 시간을 얻고자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던 결과였다.
무디의 측근들은 <이거 말도 안 되는 인격 살인이 아닙니까?>라고 분노하자, 무디는 <그 기자들이 날 잘 모르는 것 같애. 사실 나는 이 기사보다 훨씬 더 교만한데, 이만하면 잘 써 준 거 아닌가? 자,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니, 우리 모두 좀 더 겸손하기 위해 기도하기로 하지>라고 했다.
겸손은 아주 피어나기 어려운 꽃이며, 아주 힘들게 맺는 열매와 같기에 겸손한 성품은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조금만 무관심하면 교만이라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마음의 정원을 황무지로 만든다.
목요일 새벽, 솔로몬 시대에는 금 방패가 500개 있었으나, 르호보암은 금 방패를 애굽에 모두 빼앗기고 놋 방패시대로 전락했다.
놋 방패를 바라보면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놋 방패 속에 담긴 은총을 깨닫고 다시 일어나 금 방패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금 방패 같은 삶이든지, 놋 방패 상황이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다.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다(사1:9). 까먹는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아집을 버려야 한다. 초라하지만, 놋 방패라도 들게 하심은 은총이요, 기회였다.
우리가 살다보면 조금도 빠져 나갈 구멍이 없는, 감옥에 던져진 것과 같은 삶을 살 때가 있다. 때로는 광야에 홀로 던져져서 어느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삶을 살 때도 있다.
그 광야 같은 환경에도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환경만 바라보면서 불평하려는 눈을 돌려 함께 동행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야 한다.
장자의 명분이었던 축복기도를 아버지의 눈을 속여 가로챈 야곱은 살기등등한 형 에서를 피해 도망자가 되었다.
야곱은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과 외로움을 가득 안고 피곤함에 지쳐 빈들에서 잠들었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꿈 속에서 약속을 들은 야곱은 잠에서 깨자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6)”라고 고백했다. 야곱의 삶에는 위기 때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체험이 있었다.
야곱이 깨달은 것을 우리도 깨달아야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다. 우리가 만나는 어떤 환경에도 끝까지 동행하시는 성령을 민감하게 느껴야 승리할 수 있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형편은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도 있고, 영향력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신앙까지 늘 위협당하는 교회도 있다.
에베소교회와 서머나 교회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교회이다. 에베소교회는 시작부터 초대교회에서 비중 있는 사역자들을 통해 큰 열매가 충만했던 교회이다. 영적 전투를 포기하면 존재가치가 없다.
에베소교회는 기독교적인 생활은 있지만, 복음의 능력이 없고 사람의 가치관을 바꿀 수 있는 말씀의 능력이 없는 교회였다.
에베소교회와 가장 대조를 이루는 교회는 서머나 교회이다. 에베소 교인들이 볼 때 서머나 교회는 가장 불쌍한 교회이다. 그 이유는 서머나 교회가 늘 환난과 핍박 중에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서머나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이곳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별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서머나는 가난한 도시는 아니었다(자체 화폐 주조 허가).
서머나의 경제권을 유대인들이 쥐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면 그 지역에서는 경제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서머나 교회는 다른 어떤 곳보다 심한 유대인들의 핍박과 반대를 경험했기에 교회의 외형적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서머나 교회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유대인들의 회”가 있었다. 그들의 방해와 박해 때문에 교회가 너무나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초라한 교회를 향한 주님의 평가를 살펴보자.
외형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교회에 주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주께서 연약한 교회를 부끄러워하시거나 모르는 체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위기와 어려움을 통과하는 서머나교회에게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표현은 엄청난 힘이 된다.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말은 “애굽에서 바로의 압제 아래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신 모습”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결국 모든 것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것은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하여 주께서 이미 고난을 받으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이기 때문에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모든 핍박은 결국 머리이신 예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악한 유대인들이 미약해 보이는 서머나 교회를 괴롭히면서 즐기고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우주에서 가장 강한 자를 괴롭히는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싸움을 거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자들이 주께서 택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로 해서 싸우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자들이다. 다메섹 도상의 청년 사울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핍박과 조롱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임할 것이기에 가장 불쌍한 자들이다. 성도들은 나를 미워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
1. 교회의 실상을 세밀히 알고 계시는 주님(9).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사정을 세밀하게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서머나 교회의 문제는 두 가지였다. ①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환난과 궁핍이었다. 이 환난과 궁핍은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으로부터 여기된 것이었다. 에베소 북쪽 80km, 당시 인구 25만
교회의 환난은 진리를 반대하는 자들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거기에 복종하지 않고 반대하면 환난이 생기는 것이다. 반대하는 무리들 앞에 교회는 방어할 힘이 없다.
교회는 양무리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도시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 보복을 가했기 때문에 서머나 교회는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환난과 궁핍에 처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람들의 풍성함은 “자기가 현재 얼마나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통로가 막힌 것이 없느냐가 중요한 기준이다.
아무리 큰 물탱크에 물이 가득 담겨 있을지라도 공급되는 수도관이 막혔다면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연결된 수도관으로 무한정 공급된다면 후자가 훨씬 많이 소유한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 막힌 것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과 서머나 교회 사이에 관통되는 은혜의 통로)가 뚫려 있었다.
서머나 교회는 가장 어려웠지만 성도들이 궁핍한 중에 한마음이 되어 주의 은혜를 사모했다. 서머나 교회는 주께서 피할 길을 예비해 주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교회였다.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것이 어떤 것일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을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내가 쓰지 않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다(잠19:17).
하나님께 꾸어준 것이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들이다. 서머나 교회는 주께 꾸어준 것이 많은 교회였다. 왜냐하면 옆집이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아 어려우면 도와주어야 했다.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요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한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세상적으로 잘살고 풍요롭게 되어 주변을 둘러보아도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실제로는 가장 가난한 교회이다. 그 이유는 주께 꾸어드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릴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도움을 요청받을 때 짜증낼 필요가 없다. 꾸어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부자가 되는 길이다.
② 서머나 교회의 또 다른 어려움은 “자칭 유대인이라는 회” 때문이었다. 그 당시 사회 통념은 유대인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으로 통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핍박할 때 그 교회는 잘못된 모임으로 낙인 받는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훼방하는 ‘유대인의 회’를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했다.
주께서 사탄의 회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께서 보실 때 ‘유대인의 회’그 모임은 교회를 무너뜨려는 사탄의 본부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외형만 보고 진리와 비진리를 혼동한다. 간판만 거창하게 걸고 사람들만 많이 보이면 진리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사탄의 모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탄의 회’의 특징이 무엇일까? “온갖 더러운 음모와 악한 짓들이 다 나온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타락하면 불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탄의 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이성을 잃어버리면 믿지 않는 자들보다 훨씬 더 악해진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회수하실 때 건전한 상식까지 함께 거두어가시기 때문”이다.
환난과 궁핍 속에서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무엇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을까? “말씀의 은혜가 공급하는 분별력으로 고난을 이기는 것”이다.
2. 주께서 서머나 교회에 알려주신 소식(10)
주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알려 주신 소식은 “고난이 당분간 계속된다는 것”이었다(10). 주께서 서머나 교회에 알려주신 소식은 너무나 무서운 소식이었다.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서머나교회의 환난과 궁핍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 중 신실한 형제 몇 명을 옥에 던질 것이고, 거기서 그들이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무엇일까? “단순히 옥에서 고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교를 당할 것”을 의미한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순교의 영광을 얻을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위험한 것은 “잘못된 예측”이다. 고난이 길면 길다고 해 주어야 마음으로 대비할 수 있다. 고난을 이기려면 “고난의 길이와 강도”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강력하고 긴 고난이 온다는 소리를 들을 때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러나 기왕에 예비된 것이라면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감당해야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거짓된 위안은 오히려 그릇된 기대를 갖도록 만들기에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십일’은 문자적인 “십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십일’은 고난을 다 잊을 정도로 짧은 기간도 아니고, 고난 앞에서 믿음이 무너져서 신앙을 다 잃어버릴 정도로 긴 기간도 아니다.
대표성의 의미를 갖고 있는 ‘십일’은 “우리의 속사람을 정결케하고, 영적으로 거룩하도록 만드는데 충분한 시간”을 의미한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다. 고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죽을 각오를 하고 충성하라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승리하려면 적극적으로, 담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셉처럼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고난이 왔을 때 분노를 품고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해봐야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쁨으로 고난을 즐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고난 속에 감춰진 보물을 찾게 된다.
3. 주께서 주신 경고(11)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에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11).
‘귀 있는 자’는 “어려운 환난 중에서도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는 자”를 의미한다. 세상의 소리를 듣고 판단하는 능력보다 소중한 것은 주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는 능력이다.
어려움 속에서 영적인 귀가 예민해서 주께서 보내시는 음성을 민감하게 분별해야 한다. 삶이 어렵고 힘들 때는 주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해야하는 때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다. ‘둘째 사망’은 “우리가 죽은 후에 영원한 운명이 갈라지는 것”을 말한다.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고난 받는 것과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눈에 보이는 고난이 두려워서 주를 부인하면 정말 무서운 심판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이생과 저생을 다 알고 계신다.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육신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목숨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하셨다. 두 번째 사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번째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됨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겨야 두 번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신앙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해 보이는 방향으로 사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의 심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군인은 싸우기 위해 훈련된 사람들이다. 적을 보고도 싸우지 않으면 군법회의에 넘겨진다. 비진리를 보고도, 악의 세력을 보고도 영적 싸움을 포기하는 것은 좋은 군사가 아니다.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영적 신분을 감추면 안된다. 사탄은 우리의 신앙 수준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어떤 핍박과 어려움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서 악한 영이 떠나지 않는다.
진리 때문에 싸우는 싸움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포기하면 우리의 영혼은 악한 세력에게 짓밟히게 된다.
어떠한 영적 전쟁이든지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길 수 있는 모든 무기를 공급하셨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때 월남의 관리들처럼 사리사욕을 위해 무리를 팔아넘기면 패배하게 된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내를 훈련하시기 위해 주신 고난을 쉽게 포기하면 기회는 없다.
프랑스 혁명사를 쓴 토마스 칼라일은 “자기가 할 일을 발견한 사람은 복을 받은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그 이외의 복을 찾지 말게 하라”고 했다. 토마스 칼라일은 “오늘을 사랑하라”고 외쳤다.
사람에게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다.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토마스 칼라일의 가치관이다.
칼라일은 천신만고 수고 끝에 한 권의 역사책(프랑스 혁명사)을 저술했다. 그리고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웃 사람에게 자기가 쓴 원고를 읽어 줄 것을 부탁했는데 하녀가 불쏘시게로 썼다.
칼라일은 충격을 받았으나 다시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대단한 인내와 무서운 집념으로 쓴 책이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사>였다.
칼라일은 이 책으로 인해 명성을 얻었고, 영국의 문학가로서, 또한 사상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