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을 회복해야할 사람들(계2:1~7)
사도들이 세상을 모두 떠나고 사도 요한만이 남았을 때, 요한도 도미티안 황제 통치 말기(주후 95~96년경)에 복음을 증거하다가 밧모섬에 유배가 되었다. 요한은 어느 주일에 계시의 말씀을 들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들려주신 계시의 말씀을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교회에 보냈다. 일곱 교회에 대한 평가는 그 당시 교회에 대한 평가일 뿐 아니라,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 대한 평가이다.
에베소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아시아에서 첫째가는 큰 도시였다. 로마 사람들은 에베소를 아시아의 빛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고, 정치, 교통, 무역, 문화의 중심지로 부유한 도시였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에 충성하는 도시에 수여되는 자치권을 인정받아 자유로운 상거래가 이루어졌고, 로마 군대도 주둔하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Artemis) 여신상으로 인해 에베소는 더욱 향락과 퇴폐와 미신의 도시로 전락했다.
에베소는 오늘날 터키의 항구도시로서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이다. 미의 여신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음란의 도시였고, 점을 치고 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에베소교회는 주께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 교회로 성장했다. 에베소 교회는 입술로만 주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는 교회였다.
로마에 충성하는 도시 에베소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 의무였다. 황제숭배를 거부하면 목숨을 잃을 위기 상황에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순교적인 신앙을 지켰다. 목회자 폴리갑이 순교했다.
에베소 지역에는 니골라 당이 있었다. 니골라 당은 율법을 거부하며, 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육적인 것은 모두 악하고, 영적인 것만 선하다고 믿었고,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했다.
니골라 당은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했으나 삶과 생활은 변화되지 않았다. 입술로는 공경하나 호색했고, 방탕했다(사29:13).
에베소교회는 바울과 디모데, 사도 요한의 신앙 지도를 받았기에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 실력을 갖춘 교회였다.
아무리 열악한 상황을 인내하고, 이단을 감별하고, 많은 수고를 했을지라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면 사명의 촛대를 옮긴다고 하셨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형식적이고, 외식적이고, 습관화된 신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 교회의 결정적인 문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훌륭한데, 결정적인 한 가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교회가 되었다.
우리가 건강검진을 받을 때 그 목적이 무엇일까? 지금 내면의 건강 상태를 알기 위한 것이다. 내시경으로 속을 들여다보고 X-ray로 들여다보고 또 CT 촬영을 해서 점검한다.
건강검진을 할 때 속을 첨단 장비로 들여다보는 이유는 겉 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더라도 속에는 병이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몸도 그렇고 영혼도 그렇다. 겉으로는 행복해보이고 겉으로는 건강하게 보이더라도 그 속의 영혼이 병들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은 말씀과 성령으로 항상 점검해야 영적 건강을 유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베소교회의 어떤 결점을 찾아낸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교회처럼 보였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에베소에서 말씀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사도 바울이 가장 집중적으로 3년간 말씀을 가르친 곳이 에베소이다. 아볼로와, 신실한 목회자 디모데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현장에서 직접 어머니를 부탁받았던 사도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고 상당한 기간 목회했던 곳이 에베소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헌신적인 부부가 에베소 교회에서 나왔고, 소아시아 교회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회였다. 주변교회로부터 많은 칭찬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던 교회였다.
소아시아 교회 가운데 가장 신앙의 뿌리가 깊은 교회가 에베소 교회였다. 에베소 교회는 주께로부터 칭찬들을 만한 것이 많았다.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주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었다. 이는 주께서 교회와 사역자를 살피고 지키신다는 의미이다.
교회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께서 쥐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이 있고 분별력을 가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역사가 오래되면 복음보다는 자신들의 역사나 전통을 더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에베소교회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이나 복음의 능력보다는 자기들의 자랑을 더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에베소교회의 주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참된 겸손과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지 못하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음을 선포하셨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주인 떠난 허망한 빈집일 뿐이다.
1. 에베소교회의 장점
에베소교회는 가장 성경적이고 뛰어난 주의 종들이 말씀을 가르친 흔적이 남아있는 교회였다(2). 무엇보다도 열심이 있는 교회였다.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2)’라고 할 때 떠오르는 구절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살전1:3)”이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가만히 있는 믿음이 아니라 역사가 나타나는 믿음”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깨닫는 순간 비성경적인 삶을 정리했다. 믿음으로 우상을 완전히 버렸다. 믿는 순간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이 달라졌다. 초대교회는 결단력이 있는 신앙이었다.
‘사랑의 수고’는 “남을 돕고 대접하는 데 힘써 수고했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는 순회전도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영접하여 대접할 때에도 애써 수고한 흔적이 있었다.
에베소교회는 인내하는 신앙으로 웬만한 어려움은 반응도 하지 않았다. 소망의 인내가 없는 사람은 끓는 냄비처럼 쉽게 끓고 쉽게 식어버린다. 그런 후에 뒤끝이 없다고 상황을 마무리한다.
에베소교회는 사도들을 통해 신앙을 제대로 배운 모습이었다. 주께 칭찬을 크게 받은 것은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한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았다. 신앙이 사람의 정이나 인간관계 위에 세워지면 분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단들이나 거짓 교사의 특징은 그 가르침에 분명히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분별력을 발휘하여 모순을 찾아내는 것이 미혹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비결이다.
2. 에베소교회의 치명적인 문제
에베소 교회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모범적인 교회였다. 겉 포장만 잘된 교회였다. 그러나 주께서 보시기에는 모범적인 모습을 가치 없도록 만드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주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면 교회의 존립 자체를 흔들 정도였을까? 치명적인 문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4).
‘처음 사랑’은 “처음 믿을 때 체험했던 복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말한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이 기계적이다. 익숙해지는 것과 믿음의 열정은 다른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문제가 될 만한 자들을 분별하여 쫓아냈든지, 아니면 스스로 떠나버렸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심령 속에 뜨거움이 없는 것이었다. “분별력보다 더 소중한 것은 복음을 향한 열정과 뜨거움”이다.
예수께서 보실 때 에베소교회는 신종 바리새인들이 되어버렸다. 신종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는 대단히 빨랐다. 모두 자기들의 모범적인 종교생활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습관적인 신앙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디서 잊어버렸는지 찾아보고 회복하라고 하셨다.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처음 사랑과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린 어떤 계기가 있다는 것이다. 뜨거운 성령체험의 감격을 잃어버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의식적인 종교행위”가 아니다. 예배를 향한 감격과 기쁨보다 의무감으로 변했다면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복음의 열정을 잃으면 교회의 생명의 불길이 꺼진다.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신앙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신앙의 기쁨과 감격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에베소 교회는 어쩌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을까?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와의 교제”보다 “예수를 위한 일”에 더욱 집중하도록 인도하므로 정작 예수와는 멀어지도록 만든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이다. 많은 일을 해서 열매를 많이 맺기보다는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되어야 한다.
예수와 깊은 교제보다 예수를 위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면 예수의 마음을 모르는 사역자가 되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일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마치 눅15장의 맏아들은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좋은 것인줄 알았다. 그러나 맏아들은 정작 아버지의 마음은 몰랐기에 또다른 탕자였다.
예배를 드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를 통해 주와의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주를 체험하는 것인데, 봉사 때문에 말씀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기쁨 없이 봉사에만 집중하는 것은 결국 사탄이 승리하도록 만든다.
3. 니골라당
주께서는 에베소교회가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끝까지 물리친 것(6)”을 칭찬하셨다. ‘니골라’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니골라당은 율법을 무시하고 폐기하는 자들을 가르친다.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은 완성되었기에 더 이상 율법은 필요가 없으며, 또 얼마든지 회개만 하면 되니까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좋은 사도들을 통해 워낙 정통적인 가르침을 받았기에 엉터리같은 교훈은 먹혀들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칭찬하시면서 예수께서도 이와 같은 자들을 미워하셨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다니면서도 자신들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는 받았다고 하지만 전혀 자신들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니골라당”이다.
한국교회가 말씀을 듣고도 자신들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직분을 주고, 교회를 떠날까봐 두려워서 그냥 위로만 하고 만 것이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세상적으로 조금이라도 성공한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생활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를 부담없는 교제의 장소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려고 하지 않으면 니골라당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자들을 미워하신다고 하셨다. 믿는 자는 믿는 자의 길이 있고 삶이 있다. 신앙만 가졌을 뿐 가치관과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욕망을 따라 살아왔던 잘못된 삶을 청산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삶을 통제하도록 맡기는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예수의 최종적 약속은 무엇이냐(7)? ‘귀있는 자’는 누구를 말할까? 육신의 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귀를 소유한 자를 말한다.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를 말한다.
우리의 귀의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 있느냐? 어떤 사람은 귀의 안테나가 사람들의 소리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도 있다. 사람들의 소리는 잘 듣지만 성령의 소리는 전혀 깨닫지 못한다.
성령의 소리에 민감한 자들에게 주께서는 “이기라”고 하셨다. 나이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를 운동선수들을 좋아한다.
무엇을 이기라는 것일까? “심령에 자리잡은 교만과 자기만족을 이기라”는 것이다. 자기만족과 자존심을 이기고 겸손하게 말씀의 열정을 사모하는 신앙이 되라는 것이다.
주께서 복음의 열정과 뜨거움을 회복시켜 주시도록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라는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잃었던 하나님의 낙원과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영광을 허락하신다.
‘잃어버렸던 낙원’의 회복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다(고전4:20).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반드시 삶에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