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그리스도(계1:12~20)
현재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모두 페허가 되어 그 시대의 열정과 신앙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발굴된 교회 터와 기둥의 흔적만 남았다. 터키는 99.8%가 회교도이고, 기독교인은 약 0.04%정도이다.
그럼에도 터키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흔적을 유적지로 남겨 놓은 이유는 성지순례를 하는 기독교인들의 관광수입 때문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외면한 결과는 비참한 페허더미인 것이다. 성령의 음성을 외면하면 관광상품으로 전락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실 때, 사람들의 눈에는 철저한 패배로 보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세기로 접어들 즈음에 여전히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외면과 로마의 혹독한 핍박을 받았다.
제2의 네로라고 불리는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핍박이 극에 달했다. 디모데가 죽은 후에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던 사도 요한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다가 로마로 연행되었다.
로마에서 도미티안 황제는 ① 독배를 마시게 하였으나 아무런 해를 받지 않자 ②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졌지만 사우나 하듯 끓는 솥에 머물자, ③ 밧모섬에 유배시켜 혹독한 채석장의 중노동을 시켰다.
밧모섬의 가장 큰 어려움은 ① 물, ② 땔감, ③ 식량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곳에 배치되는 로마군인들도 문제군인들이었고, 군인들의 말과 행동은 무자비하고 사나웠기에 죄수들이 고생이다.
오늘 본문에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요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했다(20). 왜 교회를 촛대에 비유할까? 교회를 촛대로 비유한 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말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성막에는 창문이 없다. 성막 안을 밝혀주는 것은 오직 촛대 뿐이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16).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의 모습은 ① 항상 교회를 돌보시며 지켜주신다는 의미와, ② 마치 제사장이 성막의 등불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살피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교회에 성령의 불이 끄지지 않도록 항상 살피며 기름을 공급해 주신다. 성령의 기름이 항상 떨어지지 않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 사명이 왕같은 제사장에게 있다.
교회의 보존과 통치는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께서 주관하시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사람의 입김이 가미되면 안된다.
머리의 지시를 받지 않는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① 신적인 요소, ② 인간적인 요소이다. 신적인 요소는 교회가 단순한 인간들의 모임은 아니라는 뜻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그 뜻대로 쓰임받는다.
교회에는 인간적인 요소도 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채움 받으며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교회는 항상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 사이의 긴장이다.
두 가지가 우리를 잡아당긴다. 한쪽에서는 세상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잡아당긴다.
믿음의 본질은 세상에서 살면서도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사람이 건강한지 건강하지 않은 지는 병균에 감염되어 보아야 알 수 있다. 몸 안에 항체가 있는 사람은 병균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항체가 없으면 금방 감염되고 만다.
이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보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세상의 방식을 좇아가지 않고, 새로운 믿음의 방식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의 신앙은 엉터리 신앙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떠내려간다.
주의 날에 요한은 자기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지금부터 보는 것을 기록하여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말씀이었다.
사도 요한은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의 주인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뒤로 몸을 돌이켰더니 말씀하신 분보다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곱 금 촛대였다.
주께서는 이 세상에 빛을 밝히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 금 촛대들을 여러 곳에 세우셨다는 것이다. 어떤 금 촛대는 빛을 환하게 밝히는가 하면, 어떤 촛대는 완전히 꺼져서 전혀 빛을 내지 않는다.
주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이 촛대들에게 보내어 다시 빛을 발하게 하라”는 것이다.
주께서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는 “촛대들로 하여금 더 빛을 발하게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교회가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한 것을 알고 계셨다.
말씀이 계속적으로 충만히 공급되어야 교회는 빛을 발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당시의 교회가 너무나도 인간화되어서 신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신적인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신적인 거룩함과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없다.
주께서 나타나신 모습을 통해 그 당시 교회가 겪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당시 교회들은 세상과 다른 부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영적인 영향력과 영광을 잃어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너무나 세속화 되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교회가 불꽃처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그 당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비추어 주는 빛이 전혀 없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바다에 등대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단순히 등대지기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등대가 존대하는 것이 아니다. 등대가 설치된 부근에는 암초가 많거나 위험하기 때문이다.
등대가 없으면 배는 방향을 잃고 암초에 부딪혀서 배가 깨어지고 사람들은 죽게 될 만한 곳에 등대를 세우는 것이다. 등대는 평범해 보이는 바다에 암초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가 세상에 비추어야 할 빛도 등대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과 이 세상의 위험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 세상이 전쟁 상태에 있으며, 세상이 교회를 무시하면 무서운 암초에 부딪쳐서 파선된다는 것이다. 암초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등대의 불을 꺼서는 안된다.
아무리 세상의 반대가 심하고, 엄청난 저항의 시위와 핍박이 계속될지라도 교회의 말씀과 성령의 불을 꺼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가 밝혀주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파선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해야 한다.
기독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하기 위함”이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이러한 외침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엄청난 암초를 감지하지 못하여 파선당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특징이 무엇일까? 죄에 대한 설교, 삶을 바꾸라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바꿀 것을 요구하지 않는 교회는 불이 꺼진 등대와 같은 것이다.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대단히 영광스럽고 거룩한 모습이었다. 요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인자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자 같았다”라고 했을까? ① 요한이 다니엘서의 예언을 생각한 것이다(단7:13). ② 예수의 모습이 영적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후자가 지지를 받는다.
요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옷이었다. 그 다음에는 머리털이었고, 그 다음에는 눈이고, 그 다음에는 발이었다.
옷은 신분을 나타내고, 그 사람의 지위를 나타낸다. 사람의 마음을 보려면 항상 눈을 먼저 보아야 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듯이,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주께서 입은 옷은 발에 끌리는 옷이었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 옷의 색깔이나 디자인은 언급하지 않는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금띠를 띠었다고만 말해도 당시 성도들은 그가 누구신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는 사람은 두 종류이다. ① 세속적으로는 왕이요, ② 종교적으로는 제사장이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금띠를 두르신 분 만이 교회를 평가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그 앞에 어떤 거짓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고 해서 결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엄히 추궁하시는 모습이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지켜보신다.
주의 발은 놀랍게도 상처 입은 발이 아니라 번쩍번쩍 빛나는 주석같은 발이었다. 그 발에 한번 밟히기만 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권세있는 발이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
주께서는 지금 교회들마다 말씀의 사자들을 보내어 교회를 다스리고, 교회를 지키신다. 주의 오른손이 일곱 별에 있다. 그것은 혹독한 핍박에서도 교회의 목회자등을 붙들고 지키신다는 뜻이다.
주께서는 자신과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사자로 세우셔서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신다.연약한 자를 사자로 사용하신다.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 ① 좌우에 날선 검같은 예리함을 깨달아야 하고, ② 해같이 비취는 영광의 광채를 체험해야 한다(16).
오늘날 성도들은 비록 설교의 말씀이 나를 불쾌하게 하고, 속을 뒤집는 것일지라도 예리한 날선 검같은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용할 때 얼굴이 해같이 빛날 수 있다.
신앙은 단지 머리로 어떤 교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머리로 이해한 것은 반드시 마음에까지 영향을 주어야 한다.
흔히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에 성령께서 큰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양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임하든지, 작게 임하든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은혜를 체험한 후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교회가 세상의 빛이며, 주께서는 세상에서 온갖 핍박을 받는 교회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자신의 눈앞에 등장하신 주의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계시록이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 무엇일까? 성경을 통해서 들어왔던 수많은 예언들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성경을 정말 그대로 믿는다면 지금처럼 살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는 정신을 잃고 죽은 자처럼 쓰러져 있는 요한에게 오른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는 말씀은 “신성을 선포하신 것”이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18)’라고 하셨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죽일 수 있을까?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8)’라고 하셨다. 단순히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사망과 영원한 생명을 홀로 주관하신다고 하셨다. 죽고 사는 것이 주의 뜻에 달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성도들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께 맡겨 놓은 사람들이다. 주께서 맡으신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믿음의 순종을 포기하지 않는 한 변함이 없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담대함과 지혜로움으로 사는 것이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옳은 일을 위해 당당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
주께서는 요한에게 큰 체험을 하게 하신 후에 어떤 명령을 주셨느냐? 주께서는 요한에게 본 것을 글로 기록하라고 하셨다. 요한이 기록해야할 것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구원역사”이다.
로마의 혹독한 핍박 앞에서 교회 사역자들이 자신의 정체감을 잃고 있었다. 자신들을 세상에서 무능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생각했다. 세상은 빛과 어둠 사이의 치열한 전쟁 중이기에 담대하라.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인 소수가 역사를 움직인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능력을 체험한 창조적 소수인가?
예수를 바로 알고 믿으면 주께서 크게 역사하시고, 더 큰 비전과 꿈을 주셔서 역사의 한 시대에 크게 쓰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주저하고 머뭇거리면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