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시고 끝까지 완성하시는 하나님(계1:6~11)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위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저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제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사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면 인간 종교단체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일까? 이것을 알려면 먼저 세상에 이스라엘이 있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평가하고자 하셨다.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의 죄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의도였다. 이스라엘이 세상을 부러워하고 똑같은 가치관으로 살면서 “우리는 특별히 선택받았다”고 외치면 안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이 아니라 세상과 다를 것이 없는 모습만 보였기에 세상과 함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에 대해 어떤 희망이나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의 죄를 책망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심판이 두려워서라도 뭔가 달라지겠지” 기대하지 않았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일하실 것인가만 곧이곧대로 말했을 뿐이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모든 선지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망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신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그 어떤 기대도 가지지 않고 이미 세상을 심판해 버리셨다”는 뜻이다.
세상은 이미 에덴동산(기쁨, 풍요, 즐거움, 행복)에서 쫓겨난 상태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망할 장소로 보지 않고,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미국이 카불 공항에서 철수할 때에도 아프칸 땅에 남아 있는 미국 시민권자들이 수백명이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롯의 처를 거억하라(눅17:32)’고 하셨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떠날 수 없다.
롯의 처는 ① 많은 은혜를 누렸지만 그 은혜를 망각했던 여인, ② 종교적인 복을 가볍게 여겨 불순종한 여인, ③ 자신의 생명보다 땅의 것이 소중한 여인이었다. 소유와 욕망이 시대에 분별력으로 살자.
세상을 떠난 자로 산다는 것이 산속으로 들어가서 기도만 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떠난 자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세상을 떠난 자로 사는 것, 주 영광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부러워하고 닮아가는 이스라엘은 죄에 물든 세상과 다름이 없어진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적이지 않음으로 해서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이스라엘의 위상이고 존재 목적이다.
‘교회가 큰 건물을 짓고 부흥했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느냐?”를 살펴야 한다.
오늘 본문 5절에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는 말씀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모든 신학의 절정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의 보혈로 사셨다. 우리는 ‘예수님짜리’이다.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테텔로헤이스)”는 영수증에 “다 지불되었다”는 뜻이다.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다. 이 말은 누구의 소속이고 누구의 통치 아래에 있느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 각 나라의 한국 대사관도 위치한 나라의 통치를 받지 않기에 해외에 있어도 대한민국이다.
‘나라’는 누구의 통치 밑에 있는가? ‘나라’는 누구의 소속인가의 문제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으며 욕심을 따라 살았는데 영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제사장’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적 사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양 예수가 보혈을 흘림으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새롭고 산 길이 열렸다(히10:19~20).
성전의 휘장은 절대 인간의 힘으로는 찢을 수 없는 두께와 재질로 되어 있다. 왕같은 제사장인 우리들은 보혈을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는 실제로 역사의 현장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과의 거리는 멀고 세상과는 너무 가깝게 사는 것은 특권을 포기한 삶이다. 성도는 영혼의 혁명이 일어난 사람들이다.
사람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도와주는 척 하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이득을 반드시 계산하는 존재들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씀의 원문은 “구름과 함께(with) 오시리라”이다. 성경에서 구름은 “신적 영광과 임재의 상징”이다.
구름과 더불어 세상에 다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신다. 심판은 홀로하시는 역사가 아니라 함께 오셔서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키신다는 것이다.
‘그를 찌른 자들’은 로마 군병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자들에 대한 우주적 표현이다. 역사를 통틀어 말씀을 대적하고, 예수의 생명과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애곡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애굽의 10번째 재앙 때 어린 양의 피를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은 재앙을 벗어났고, 불순종한 집은 장자가 죽고,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다.
‘알파와 오메가’는 “나는 시작을 했으면 반드시 그것을 끝낸다”는 신적 의지의 표명이다. 우리가 개판으로 살아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우리를 향한 구원과 사랑을 확고하게 보증하는 말씀이 “알파와 오메가”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확고하며, 또한 그 성취가 그분의 전능하심과 주권 아래서 마무리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현실의 삶을 말한다. 내 삶의 영역 중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영역(재정, 시간사용, 부부관계, 자녀교육 등)이 있는가?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사도 된 바울”같이 반드시 직함을 넣었다. 그러나 요한은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너희 형제(9)”라고 표현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친숙한 관계였다.
성도들에게 환난과 핍박오는 이유는 2가지 이다. ① 소극적 의미는 “세상이 생명을 싫어한다”는 것이고, ② 적극적인 의미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요한복음>은 전체적으로 세상은 생명을 싫어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파하고 있다. 예수생명을 지닌 성도들이 생명을 본질적으로 배척하고 싫어하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핍박의 원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에게 “어떻게 그 혹독한 감옥에서 생존할 수 있었느냐?”라고 물었다.
빅터 프랭클은 주저하지 않고 ‘한숨과 눈물’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삶을 붙들며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눈물과 한숨”이다. 삶을 포기하면 엉망으로 산다.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환난의 이유를 잘 보여준다. 내가 환난을 겪지 않고서는 내 속사람의 용량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외웠다고, 배웠다고 실력이 되지 않는다.
수영을 배우거나 태권도를 배울 때 방법을 배웠다고 곧바로 실력발휘를 할 수 없다. 몸이 반응할 때까지 수많은 시간동안 반복 훈련해야 한다. 환난과 시련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담금질한다.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도 소아시아 교회들이 겪고 있는 환난에 동참하고 있다. 도미티안 황제 때 가장 극심한 환난이 교회에 불어 닥쳤다. 요한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유배되었다.
‘예수의 환난(9)’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로 인하여, 예수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라는 뜻이다. 주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환난은 ‘예수의 환난’인 것이다.
예수의 환난이 있는 것은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노리는 적의 총구가 있다. 기회만 있으면 공격하고, 비방하고, 조롱할 것이다(잠24:10-낙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사탄은 패배했지만 엄청난 세력의 패잔병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들을 찾아 돌아다닌다. 패잔병들의 무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하려고 기회를 엿본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예수의 환난을 당해 보면, 예수를 믿는 흔적을 소유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환난과 핍박의 의미를 정리하면, ① 세상이 본질적으로 성도들을 거절하기에 환난을 겪게 되고, ②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환난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이 복음을 환영하던 시대는 없었다.
‘주의 날’은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기원이다. 이전까지는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주의 날”이라는 기록이 없다(안식 후 첫 날).
주일을 지키는 것은 “누가 역사의 주권을 지니고 있으며 그 도래하는 날이 누구의 날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이 된 사도 요한은 나팔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똑같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성령에 감동되어 들어야 한다. 사람의 말로 받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살전2:13).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깨달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게 하시고,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역사하신다. 우리의 지각을 깨우는 성령에 감동됨은 강하고 담대한 신앙의 출발점이다.
우리의 지각으로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격이 성령께 깊이 잠기는 은총을 받아야 변함없이 헌신할 수 있다. 마치 스펀지에 물이 가득 배는 것처럼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는 것이다.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성령께서 미치는 강도는 더 커질 것이다. 작은 그릇은 금방 충만해지지만 또한 금방 고갈된다.
신앙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더 많은 시간을 말씀과 성령의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더욱더 자신의 기질을 다스려야 한다.
사도 요한은 유배된 밧모섬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영적인 흥분 상태에서 뒤에서 들리는 나팔 고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10).
나팔소리는 구약에서 3가지 경우에 등장한다. ① 전쟁을 시작할 때, ② 왕이 출현할 때, ③ 축제가 시작될 때이다.
사도 요한이 들었던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은 “전쟁을 알리는 의미를 제외한 나머지 두 경유가 엉켜 있다”고 보면 된다. 왕의 출현과 함께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다.
요한계시록에는 ‘……같은’이라는 표현이 계속 등장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 소리는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일곱 교회에 보내라(11)”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었다. 일곱 교회는 모든 세대의 교회를 다 포함하며, 현실의 역사 속에 실존했던 교회이다.
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낼까? 아시아 지역은 교회가 가장 번창했던 곳이기에 항상 마귀의 공격목표였다. 언제나 마귀의 공격은 말씀과 기도가 충만한 성도와 교회를 향한다.
사단과 뱀의 공통적인 속성은 “죽은 것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뱀은 순수한 색이 하나도 없고, 자기 외에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이기적). 뱀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생명을 빼앗는다.
뱀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자는 일만 하면서 음란을 즐기는 동물이다. 마귀에게 미혹된 사람은 말과 삶이 음란해진다. 뱀은 언제나 어둡고 습하고 그늘진 곳을 좋아하고 약한 것을 공격한다.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면 예배가 뜨겁고, 찬양과 기도가 뜨거워진다. 그러나 사탄이 역사하면 자꾸만 마음이 냉랭해진다. 열로 생명을 유지하는 인체에서 40도 이상이거나 34도로 내려가면 위험하다.
지금 환난당하는 성도들이 보기에 로마의 권력은 중단될 것 같지 않았다. 로마 황제는 영원히 왕노릇하며, 교회를 핍박할 것 같았다. 그래서 로마가 두려워서 주께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애굽의 바로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처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알파와 오메가’로 소개하시면서 약속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라고 하셨다.
애굽의 바로가 소유한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지 않는 바로와 전쟁을 하시면서 미물들을 통해 치셨다. 신처럼 교만하게 행동하는 바로가 하나님 앞에 하찮은 미물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로마 황제의 ‘알파’이시고, ‘오메가’라고 선포하셨다. 어떤 방식으로 권좌에 있는 자들을 낮추실 지는 알지 못한다.
당시 로마는 너무나도 사치하고 방탕해서 지저분하고 힘든 일은 스스로 하지 않았다. 소위 ‘3D’에 해당되는 일은 야만인들에게 맡겼다. 군대도 야만인 용병들에게 맡겼다가 로마는 정복당했다.
‘3D’업종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직업군이다. 일이 힘들어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는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만이 남아있다. 외국인들이 카르텔을 조직하여 일거리를 장악한다.
교회가 사람을 두려워해서 미리 무릎을 꿇었을 때 교회는 이미 긴장이 없다. 가시적인 교회는 지속되겠지만 그 안에 살아 있는 생명력이 없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교회는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돈에 무릎을 꿇고, 현실에 무릎을 꿇은 교회는 이미 그 순수성을 잃었고 오히려 참된 교회를 대적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이미 바알에게 머리를 숙인 자가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