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히 일어날 일들과 교회의 사명(계1:1~6)
20년 8월 첫주부터 시작한 요한계시록 강해는 이제 서론(프롤로그)와 후기(에필로그)를 남겨 놓았다. 로마의 10대 박해가 200년간 진행될 때 최종적인 교회의 운명을 포함한 모든 것이 불안했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교회에서 많이 애독되고 설교되었던 말씀이 요한계시록이다. 결국 일본은 계시록을 설교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교회는 계시록의 말씀을 붙들고 어두운 세월을 인내했다.
요한계시록은 전체 404개 구절 가운데 278개 구절이 구약성경을 언급한다. 구약성경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인유(다른 예를 끌어다가 비유함, 약 500회 이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요한계시록도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세상에 종말은 온다. ② 종말은 왜 있는가? 그 이유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야 하기 때문이다. 종말은 우리를 위협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종지부가 찍혀야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③ 영원한 천국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는 나라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의 삶에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진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단어는 ‘계시(1)’와 ‘예언의 말씀(3)’이다. 요한계시록은 게시와 예언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아주 독특한 책이다. 구약의 계시의 책은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구약에서 계시의 책들이 쓰여진 시대는 전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독한 고난에 놓여 있을 때였다. 기나긴 고난에 지치지 않도록 주위를 환기시키고 상징과 환상 등으로 관심을 깨우기 위함이다.
지속되는 포로생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서히 지치고, 짓누르는 역사의 고통 때문에 좌절하고 포기할 즈음에 계시를 주셨다.
예언도 장래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이지만, 예언은 장래 일어날 일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계획을 하나님의 의지를 동원해서 역사 속에서 성취시키심을 선지자를 통해 설명하신다.
계시는 궁극적인 큰 틀만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예언은 그 궁극적인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속에서 성취하느냐를 보여준다.
누가 ‘서울은 얼마나 큰 도시입니까?’라고 물을 때, 통계학적으로 복잡한 자료를 보여주기보다 “하루에 5톤 트럭 2천대 분량의 쓰레기가 나오는 도시”라고 설명하는 편이 쉽다. 계시록의 설명 방식
로마제국이 황제 숭배하는 자에게는 1%의 이자를, 황제 숭배를 거절하면 50%의 이자를 매기고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로마 정부가 알 수 없는 계시와 예언으로 기록되었다.
그 당시에 일곱 교회만 존재한 것이 아닌데 왜 하필이면 일곱 교회만 선택해서 계시록을 읽도록 했을까? 그 이유는 일곱 교회가 각각 지니고 있는 대표성 때문이다. 대표성은 책임이 부여된다.
요한계시록은 현실의 무서운 핍박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성도들에게 완성될 종말을 보여주시며 다독이시는 것이다. 반드시 역사의 종말이 올 것이니까 그때까지 거룩한 신부로 단장하라.
계시록은 무서운 책이 아니라, 들끓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이다.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오늘을 살라.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를 묘사하는 것으로 계시록은 시작한다. 본문 1절의 뿌리는 단2:28~30, 45~47절이다.
다니엘이 명백히 ‘후일에’ 일어날 일(단2:28)이라고 말하는 것을 요한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기록한다. 다니엘이 후일에 일어날 일로 기대한 것을 요한은 ‘속히, 가까움’으로 표현했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 나라의 출범과 관련된 다니엘서 예언의 성취로 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만 벌여놓고 수습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대책 없이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반드시 이루신다.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흩어졌을 때 교회는 실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성도들이 흩어지면서 온 세상에 복음을 퍼뜨렸다. 우리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신다.
‘속히 될 일’은 시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계획의 긴급성을 의미한다. 당장 1~2년 안에 모두 이루어지리라고 요한이 계시록을 보낸 것이 아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긴박하다.
119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지나갈 때 빨리 길을 비켜주는 이유는 “그 안에 한 생명이 죽어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에 관계되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 긴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왜 긴박한 것일까?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긴박한 것이다. 성도들의 삶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영적 전쟁 중이기에)이어야 한다.
‘그의 천사를 보내어’는 계시록은 사도 요한의 내적인 깨달음을 통해 주신 말씀이 아니고, 마치 영화를 보듯이 펼쳐 보이신 것이다.
왜 굳이 요한계시록만 영화를 보여주듯이 수많은 장면들과 어려운 상징들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셨을까? 그 당시 교회가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모든 것들이 검열을 받는 상황으로 보인다.
모든 문서들마다 검열되고, 조금만 로마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도 가차 없이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언어를 통한 메시지로는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다.
소아시아에 사는 성도들은 한 짐승의 모습이 로마의 황제라는 것을 알지만 로마 당국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 수많은 상징들과 숫자가 등장하는 것은 의미는 전달하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다니엘 시대에도 교회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황이었기에 묵시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확신과 소망을 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자기에게 전달된 계시를 모두 증거했다.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더 강조하거나 도움이 안되는 것은 빼지 않았다.
성령께서 주신 말씀을 모두 다 증거했고, 또한 선포된 그 말씀이 각 교회에 어떤 역사를 일으킬지는 성령께 맡겼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다. 그러나 사람의 욕구와 상관없이 세워져서 지탱되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사람의 필요와 전혀 상관없이 세워진 곳이기에 사람들이 가장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곳이 교회이다. 더욱이 교회를 다님으로 박해의 대상이 되거나 모든 것을 잃게 될 때 교회를 떠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교회의 문을 닫게 하는 것은 핍박과 어려움의 때가 아니다. 유럽의 국가들을 볼 때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주의가 교회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세상을 즐기려고 예배와 말씀을 멀리한다.
왜 주께서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 핍박과 불이익이 주어질 때 어느 누구도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거나 신앙을 감춘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는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공격의 표적이다. 어려운 시기에는 아무도 책임지는 자리에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는 때는 세속주의와 황제 숭배의 핍박을 교회가 와해되는 시점이었다. 세속주의는 삶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몰아내고 사람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즐기는 것을 말한다.
주께서 교회에 주신 1차적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다(고전4:1~2). 하나님의 비밀을 교회에 맡겨 두셨다. 말씀을 매일 읽고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 말씀을 맡은 자들의 삶이다.
말씀이 교회에 맡겨졌다는 것은 “말씀의 선포가 교회의 고유한 사명”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고전1:21)
만약 교회가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온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계속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사명은 설교자 혼자의 사명이 아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이미 설교의 한 부분이다.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들은 이미 설교의 절반 이상을 돕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귀한 사명은 온 교회가 말씀 안에 들어 있는 비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할 때 밝히고 이 세상에 삶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현대판 에서들이 한국교회에 너무 많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해 장자의 권리를 팔았다. 그 당시 장자의 권리는 ① 하나님의 구원의 중심이 되는 특권이고, ② 하나님의 비밀이 맡겨지는 권리이다.
악의 세력이 교회를 핍박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통치의 시계는 더 빨리 돌아간다. 세상의 모든 재앙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대심판에 대한 예고편들이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을 때부터 이미 멸망의 초시계는 켜져 있었다(루스 타임). 예수께서는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느니라(마24:28)”고 말씀하셨다.
주검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시체를 의미한다. 말씀을 전해도 반응이 없고 설교를 해도 반응이 없고 늘 그대로일 뿐이다. 반면에 살아서 움직이는 자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는 것이다.
① 교회가 세상에 삼킨 바 되었을 때, ② 또 너무나 핍박을 두려워해서 스스로 숨쉬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독수리가 날아온다. 교회가 살아서 움직이는 한 절대로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주께서는 로마의 힘에 의해 세상이 끝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교회가 멸망하는 것은 로마의 박해 때문이 아니다. 교회 자체가 진리를 떠나서 스스로 죽어 버리는 것이 이 세상의 심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현실이 어려울수록 교회가 깨어서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 그 진리를 알리고 드러낼 때 교회도 살고, 세상도 산다. 교회가 진리를 숨기고 감추면 독수리가 덮치는 시간이다.
세상의 종말은 ① 아무리 전도를 해도 더 이상 믿는 사람이 없을 때, ② 진리가 활동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을 때, ③ 교회가 온전히 성숙되어 더 이상 연단과 훈련이 필요없을 때 임한다.
교회가 살아있는 것이 세상에는 큰 축복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악할수록, 핍박이 심할수록 교회는 더욱더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사도 요한은 핍박과 고통 중에 있는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긴 수식어를 붙여서 인사를 했다(4~5).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계시록의 말씀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곳들이 마귀의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의 공격목표 1번지에 만약 증원부대를 부내지 않으면 교회는 살아남을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말씀을 보내셨다.
어떤 신앙이든지 내가 이해하는 것만 행동하고 그 이상은 죽어도 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신앙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그 때 말씀의 능력이 필요하다.
당시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의 평화를 이룩했다. 로마 원로원에서 로마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며 절대 복종했다. 적어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로마는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제 전 세계에서 로마 황제의 유일한 적은 교회였다. 자신을 신의 위치에 놓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이다. 자기를 절대적인 위치에 놓는 사람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이제도 계시고(4)’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냥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저울에 올려 그 죄의 중량을 달아 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어느 수준까지만 허용하신다. 그 수준에 도달하는 즉시 그 죄의 세력은 한 순간에 끝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저울의 위력이다. ‘전에도 계시고’는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낸다.
‘장차 오신다(4)’는 말은 앞으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변함없이 간섭하시고 함께하시며 결국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심판하실 분이시다.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라는 말씀은 성령을 가리킨다. 단순히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왜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을까? 성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설명으로 해석한다.
예수를 ‘충성된 증인(5)’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죽기까지 지키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언약을 붙드신 것처럼, 이제 교회에 필요한 것은 편한 삶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핍박당하는 교회를 향해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하셨다. 세상이 주는 위장된 평화가 아니라 참된 평화를 빼앗기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