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치유사역과 새벽기도와 전도 사역(막1:29~39)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직접 우리를 심방오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이 죄를 범한 뒤,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것이었다.
인류의 공통적인 현상은 “영적으로 문제가 생긴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거나 도망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담도 그랬고, 요나도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으나 그 길 끝에 주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다윗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바다 끝에 갈지라도, 심지어는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에 계실 것(시139:7~9)”이라고 고백했다.
아담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을 때 심방을 가셨던 분이시다. 훗날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의 보혈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성령을 우리의 심령에 보내셨다.
예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사는 것이었다. 이것을 육체적으로 병이 낫고 정신병이 치료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셨다.
예수께서는 어디까지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가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실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람들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가 치유 사역을 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복음에 마음 문을 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근본 목적은 전도에 있었다. 전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치신 것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열병’이란 단어를 주목해보자. 우리 성경에는 ‘열병’이라는 명사로 기록되었는데, 원문에는 동사분사형으로 쓰였다. 동사분사형은 어떤 상태가 반복되고 있을 때 사용한다. 장모의 열병은 지속적으로 열이 오르는 상태, 곧 화병이 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운 상황을 예수께 말씀드렸다(30).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아 가족을 부양하던 가장이 어느 날, 눈빛이 달라지더니 모두 집어던지고 따라나섰다.
베드로가 그물과 배를 버린 것은 가족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자연적으로 열불이 날 사람은 아내이고, 다음은 아내의 부모이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열병이 난다.
예수는 가슴에 불덩어리는 끌어안고 걱정과 불안 속에 살고 있는 여인을 간과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주께서는 영혼의 아픔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사람이 손을 맞잡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교제의 수단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주신 뒤 그녀를 일으키셨다.
‘일으키다’는 원문에서 “에게이로(다시 살아나다)”라고 쓰였는데, 부활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생명이 예수의 손을 통해 베드로의 장모에게 들어가자 병든 마음이 치유되었다.
지금까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착하던 베드로의 장모의 가슴속에 인생을 뒤바꾸는 불덩어리 하나가 던져졌다.
예수와 성령은 항상 주도적으로 일을 행하신다.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일방적으로 손잡아주시고, 일방적으로 일으키신다.
인생을 뒤바꾸는 불덩어리가 던져진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와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 변화되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신 첫 사건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치유의 결과로 고침을 받은 자가 섬기는 자, 곧 수종 드는 자로 변화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수종 들다(디아코네오)’라는 동사에서 “집사”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본래의 의미처럼 집사의 임무는 수종 드는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의 손에 붙잡혀 그동안 살아온 물리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와 제자들을 수종드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에 대해 의사였던 누가는 “중한 열병(눅4:38)”이라고 했고, 예수께서 열병을 꾸짖으셨다고 했다(눅4:39).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실 때와 중한 열병을 치유하실 때 동일하게 꾸짖으셨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과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메시아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사역의 대표성을 띠는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중한 열병을 고치신 것은 단순히 어떤 개인의 육체적인 질병의 치료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탄이 물러간 것은 우리를 얽매이고 있는 것에서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면, 병에서의 치유는 우리의 연약함에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죄의 결과로 이 땅에서 육체의 한계를 경험하며 산다.
우리 모두는 돈이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과 괴로움과 불안함과 삶의 허무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오는 모든 것에서 회복되는 길은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심령에 임하여 우리가 우리의 주인됨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면 회복의 역사를 체험한다.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베드로의 장모의 중한 열병을 고치심으로 나타났던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고 있었다.
저물어 해가 질 때에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데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모였다.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해가 진 다음에 데리고 온 것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유대 사람들은 해가 질 때부터 다음 날로 여기기 때문에 안식일은 해가 질 때 끝이 난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려왔고 예수는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불행하게도 당시 사람들은 안식일이라는 날 자체에 묶여 있었다.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못하도록 율법 조항까지 만들었다.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축제의 날이나 생명의 날이 아니었다.
『목회와 신학』이라는 책을 보니까, 놀라운 것은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소위 “손 없는 날”을 찾아서 이사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성도들 중에 점쟁이를 찾아 점을 보는 사람들도 20% 가까이 된다는 슬픈 통계도 있다. 인생의 중요한 방향을 결정하는 일을 어떻게 가짜에게 맡길 수 있을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33)’ 문법적으로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야 맞을 것이나 그것은 말씀의 의도를 훼손하는 것이다. 당시 동네는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이 녹아 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오늘 본문은 온 동네가 병들었다는 것을 말씀한다.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관습과 제도에 억눌린 채 신음하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마가는 ‘온 동네 사람들’이 아닌 “온 동네”로 기록했다.
누가복음을 보면, 의사인 누가는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고 했다(눅4:40). 하나님 나라의 임함으로 나타나는 귀신의 쫓겨남과 병의 치유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다.
가버나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 임하게 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예수께서는 동일하게 역사하시며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막1:24, 34절을 통해 마귀가 하는 것처럼 입술로만 고백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입으로만 믿는 것은 마귀도 한다.
귀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지만 그분을 따르지 않았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동이 별개인 것이다. 예수는 자신에 대해 왜곡된 상황을 만들까봐 귀신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구변에는 능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음을 보며,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4:20)”고 했다.
세상의 의술이 포기하는 난치병들도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말과 성품과 행동이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이 어떤 것인지 체험되게 해야 한다.
온 동네를 치유하는 사역을 하신 뒤 예수는 세속적인 문화와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공간인 광야로 돌아가서 경건의 시간을 가지셨다.
36~37절을 보면, 예수께서 귀신을 쫓으시고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을 본 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예수께 몰려왔다. 사람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으나 병고침과 귀신이 쫓겨남의 본질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예수를 단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만 인식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전도하려고 가셨다. 누가복음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려고(눅4:43)” 보냄을 받았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오해받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다.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4:43)”고 하셨다. 예수를 믿고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놀라운 능력들이 체험되지만 순서가 바뀌면 안된다.
질병을 고침 받거나 귀신이 쫓겨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치유와 귀신이 쫓겨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과정이나 결과일 뿐이다. 예수 믿는 목적이 부자 되거나 건강해짐이 아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지 귀신을 섬기지 않는 나라가 없고 무당을 섬기지 않는 나라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의 명령으로 귀신들이 떠날 때 꼭 하는 말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남의 실제적 증거를 보여주시는 와중에서 예수는 기도하셨다. 예수는 공생애 동안, 지속적으로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기도가 필요 없으신 분이시지만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오히려 미명에)’ 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예수는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냄으로 인기는 점점 높아졌을 때 기도의 자리로 가셨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자기의 생각과 뜻대로 행동하게 된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와 씨름하지 않고 기도로 승부를 봐야 한다. 우리 삶에는 꼭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면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삶의 기초가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는 드러난 시간보다 숨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많았다.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
예수는 기도와 말씀 위에서 사셨기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돌팔매질을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말씀과 기도의 영성으로 견고한 기둥처럼 굳건해야 한다.
예수의 모든 능력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했다. 아무리 겸손한 사람이라도 인기 앞에서는 쉽게 흔들리고 만다. 인기가 절정에 오를 때 위험의 덫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세상이 어둠에 갇혀 있는 시간, 모두 잠들어있는 그 시간에 예수는 홀로 깨어 그 어둠을 주시하고 계셨다. 예수께서 새벽에 깨어 계신 것은 잠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명암 구도를 통해 예수께서 세상을 향해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신지를 설명하고자 하셨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새벽 예배는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세상 가운데 먼저 깨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주목하고, 주의 길을 내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 길을 내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예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기도하면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의 일인지 기도로 물어보셨다. 예수께서 내린 결론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른 길을 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믿음의 후배들이 바르게 걸어갈 수 있도록 성실하게 길을 내야 한다.
‘예수의 뒤를 따라간 사람들(36)’은 각자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예수를 찾아 다녔다. 열광적으로 예수를 쫓아다니지만 정작 대화를 나누고 신앙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따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 나서는 상황에서 예수는 단호하게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셨다(38). 이것은 단순히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군사 용어로 “퇴각”의 의미와 흡사하다.
더 이상 가버나움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니까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자는 것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리, 박수갈채를 받는 자리에서 단호하게 떠나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는 인기에 편승하지 않으셨고, 사람들의 환호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셨다. 인기에 편승하여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우리의 삶에 교묘하게 파고드는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