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아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1:21~28)
한글성경은 악한 영들의 존재를 ‘사탄’ ‘사단’ ‘마귀’ ‘귀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탄’과 ‘사단’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마귀’와 ‘귀신’은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질문들이 많다.
‘사탄’과 ‘사단’은 같은 말이며 발음상의 문제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 원문이 두 단어를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할 때 다른 음역(音譯)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1961년에 개정된 개역한글성경은 ‘사단’이라고 번역했지만 1998년에 개정된 후 대부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과 공동번역, 현대어성경, 표준새번역 등은 ‘사탄’으로 번역했다.
둘 중에 더 정확한 음역은 ‘사탄’(Satan)이며 ‘대적’ ‘대적자’ ‘고소자’라는 뜻이다. ‘마귀’는 히브리어인 ‘사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디아볼로’(διαβλλω)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히브리어이고, ‘마귀’는 헬라어인 셈이다. 성경은 ‘사탄’과 ‘마귀’를 단수로 기록하고 있지만 ‘귀신(daimon)’은 단수와 복수로 모두 사용되고 있다.
성경의 여러 본문을 고려할 때 ‘귀신(다이몬)’은 ‘사탄’ 혹은 ‘마귀’가 부리고 있는 낮은 등급의 악한 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타락한 천사장의 우두머리를 사탄이라고 하는데, 사탄은 곧 대적자라는 뜻이다. 본문은 사탄의 졸개인 귀신의 존재가 언급된다.
귀신 들린 자가 안식일에 회당에 있는 장면은 참으로 모순적이다. 가장 거룩한 날, 가장 거룩한 장소에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가 등장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동네”라는 뜻을 가졌다.
메시아로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은 안식일 아침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역으로부터 시작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셨다.
예수는 억눌린 자,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참 자유와 위로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첫 사역지를 위로의 동네를 택하셨다. 진정한 위로는 귀신의 억압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심에 뭇 사람들이 놀랐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있는 분처럼 가르치셨다.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회당은 교회가 생기기 전 유대인의 모임장소였다. 회당은 구약의 성전처럼 거룩하거나 권위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랍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장소가 회당이었고, 교육과 결혼과 장례식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도 회당이었다.
2015년 2월 어린이대공원에서 경력 20년의 베테랑 사육사가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사자에게 목과 온몸을 물려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사자와 대화를 할 수 없으니까 끔찍한 변을 당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은 동물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가정에서도 가치관이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다.
부모의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녀들이 집을 뛰쳐나가거나, 탈선하거나, 심지어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도 발생한다.
우리가 섬김을 누리기 위해서는 섬기는 자의 섬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자가 사육사의 섬김을 조금만 알았다면 비극은 없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는 분으로 소개한다. 마가 요한이 증언하는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를 섬기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섬김의 손길을 이해하면 변화가 이루어진다.
예수는 우리를 섬기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보혈을 흘리셨다. 지금도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고 계신다. 섬김의 효과가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사육사의 섬김을 이해 못한 사자처럼, 아직 철들지 않은 자녀들처럼 하나님의 섬김의 손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마가 요한도 한때 하나님의 섬김의 손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인내심 부족으로 실패를 경험한 마가 요한을 위해 격려자 바나바와 사도 베드로를 준비하셨다. 결국 마가를 데리고 다니면서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든 것은 사도 베드로였다.
결국 마가는 모든 낙심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 훌륭한 사역자가 되었다. 완강하게 거부했던 바울이 가장 총애하는 사역자가 되었다(딤후4:11).
마가요한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① 하나님의 섬김의 손길을 이해하라. ② 우리를 섬기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③ 예수는 섬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다. 이제 섬김의 손길을 이해하고 섬김의 손길을 누려보라고 외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섬김의 손길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시는 2가지 영역에 대해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침으로 섬기시고,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섬겨 주신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질병의 문제, 경제적 문제, 자녀의 문제, 관계의 문제...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서쪽에 있는 꽤 큰 도시였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 예수가 많은 일을 하셨다. 마가는 예수의 가르침의 특징을 “권위 있는 자와 같다”고 했다.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외형적으로 굉장히 엄숙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늘 형식에 치우쳐서 율법의 정신보다는 외형을 가르쳤다. 그 결과는 늘 종교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매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그 모든 것을 종교생활로 이해하는 것이다. 졸아도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을 체험하지 못해도 주일예배를 드렸으니 됐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죽어 있는 종교적 교훈이 아니었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면 무한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과거보다 나아졌느냐? 수많은 정보들 가운데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에 점점 피폐해진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에 있었지만 회당은 유대인이 사는 동네마다 있었다. 회당의 전통적인 기능은 ① 기도하는 집, ② 집회하는 집, ③ 학습하는 집이라는 3가지 이름을 가졌다.
회당의 기원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바벨론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어졌다.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가 헤롯성전을 파괴하자 회당의 중요성은 커졌다. 그 이후로 회당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나님께 제사만 드렸던 예루살렘 성전과는 달리 회당에서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지 않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회당은 유대인들을 위한 초등학교였고,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문제를 재판하는 장소였고, 랍비들이나 은신처를 찾는 이방인들의 숙박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육받고 서로 교제하고,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신앙과 삶의 중심지였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회당장이 예배를 주관했는데,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주로 말씀을 가르쳤고, 때로는 회당장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에게 말씀을 강론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회당장이 예수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회당과 같이 교육의 장소일 뿐 아니라 삶의 활력과 안식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가 성도들의 삶 전체를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 신앙과 삶의 터전인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듣는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은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과는 다르게 권세 있는 자와 같았다고 한다.
당시 서기관들은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율법의 교사들이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을 설명하는 정도였고, 유명한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는 정도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산상보훈(마5~7장)을 비추어 볼 때, 기존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는 교훈이었다. 마5장을 보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필요 없는 것을 첨가시켰다.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마5:17)”고 하셨다. ‘완성하다’는 말의 원어적 뜻은 “본질을 회복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예수는 말씀의 본질을 회복시켜 주고 원래의 의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는 회당에서 말씀의 본질을 회복시켜 원래의 의미를 가르쳐 주심으로 권위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요즘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지 오래 되었기에 교회와 성도의 진정한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의 권위는 성경이 원래 의도하였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교회의 권위가 회복될 수 있다.
성도로서의 권위를 회복하려면 먼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바른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세상 사람의 기준에서 볼 때 파격적이고 수준 높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예수 믿는 자의 권위가 회복된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살펴보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복음의 본질을 바로 깨달음으로 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으셨다. 예수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귀신이 와서 설교 중간에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귀신의 외침이 다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몰랐고, 제자들도 몰랐던 사실을 귀신이 외쳤다.
그 누구도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귀신을 칭찬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예수는 귀신을 꾸짖고 그 사람에게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하셨다. 사실을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귀신의 외침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로잡아 그 사람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목적임을 아셨기에 옳은 말을 하는 귀신을 꾸짖고 나오게 하셨다.
‘더러운 귀신(26)’에서 ‘더럽다’는 것은 “외모적으로 더럽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조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러운 영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예수의 사역은 가르침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으로 바뀌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사역이 사람과 세상을 오염시키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차원으로 진행되었다.
‘더러운 영을 몰아내는 사역’은 구약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다. ‘모든 더러운 것들(겔36:25, 29)’에서 구원할 것을 언약하셨다. 모든 더러운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머물게 하신다.
더러운 귀신은 ‘큰 소리를 질러(23)’ 예수께 선제공격을 했다. 이는 예수의 등장과 가르침으로 자기의 존재와 영역이 위협받고 있음을 방증하고, 사로잡은 사람을 계속 자기 통치하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다.
더러운 영의 선제공격이 패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러운 귀신의 외침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방어였다.
사탄은 예수의 사역 중 하나가 마귀를 멸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을 방어하려고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외쳤다.
구약에 보면 전쟁을 할 때 강한 나라가 공격하면 약한 나라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상대방을 인정했다. 공생애를 시작하려는 예수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했던 사탄은 사역을 방해하려고 했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5)”고 하셨다.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경련을 일으키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되었다(26).
하나님의 복음이 임하는 곳마다 마귀가 쫓겨나야 한다. 더러운 귀신에 쫓겨난 것은 지금까지 억눌려 있었던 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얽매이게 하고 구속했던 것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회당 안에도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가 누구인 줄 안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귀신을 망하게 하려고 오셨다. 귀신은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생각과 행동을 조종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귀신을 향해 꾸짖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회복되는 과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권세 있는 새로운 교훈(27)”이라고 했다.
그동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주고 파격적인 가르침을 하셨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권위 있는 회복된 말씀의 능력이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도 얽매이기 쉬운 것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도와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이 내게 부딪치게 될 때이다. 기존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 주는 권위 있는 말씀, 말씀의 원래의 의미를 깨달아야 가능하다.
예수의 사역은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는 가르침이었고, 세상의 가르침과 구별되는 파격적인 가르침이었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은 능력이 동반되었기에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