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애의 밑그림과 시험에서의 승리(막1:9~13)
세례요한이 선포한 ‘새롭게 시작되는 복음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혈통적이고 민족적 특권이 유효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와 철저한 삶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말씀이다.
새롭게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영역(천국)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개종한 것과 같은 마음과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사역과 선포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예루살렘에서 요단강까지의 거리는 40km 가까이 되는 거리이다. 게다가 광야라는 지리적 위치는 찾아가서 세례받기가 쉽지 않은 장소였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갈급해 하고 몰려드는 이유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소위 ‘암흑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400년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에 갈급함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400년 동안 정치적 핍박과 사회적 혼란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있었다.
이스라엘이 칠흙같은 어두운 시기를 경험하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이 소망했던 메시아가 오신다는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구름 떼처럼 광야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로 몰려갔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능력 있게 선포됨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로 착각하기도 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할 일과 예수께서 하실 일에 대해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역자들은 자신을 통해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면 마치 자신이 그 능력을 행한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할 때가 많다.
요단강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철철 넘치는 요단강을 언약궤를 메고 건넜던 장면이다.
제사장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언약궤를 메고 철철 넘치는 요단강물에 발이 닫자 물이 끊어져서 건넜다. 구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요단강에서(5, 9)’라는 말씀이 공통적으로 쓰이지만 원문 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좀 다르다. 5절의 ‘요단 강에서’는 “몸의 일부가 강물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에, 9절은 “몸 전체가 완전히 강물 속에 잠겨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를 마가는 “회개의 세례(4)”라고 기록했다.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속량하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따로 혼자 세례를 받았던 것이 아니고 군중의 한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으셨다(눅3:21).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받으러 나오시자 세례요한이 셰례를 주지 않으려 했다(마3:14).
그 때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예수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오셨음을 보여주셨다.
세례요한은 예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이 너무 황송하고 분에 넘치는 일인 줄 알고 거절했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겸손한 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나에게 맡겨진 일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너무 과분하게 여겨져도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면 감당해야 한다.
만약 세례 요한이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서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면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로는 나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 주어질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을 가진 자의 자세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수모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죄인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회개의 세례도 받으셨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너무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예배도, 전도도 너무 폼만 잡으려고 하고 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망가져도 괜찮다. 예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대가를 지불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심과 성령의 내려오심이 맞물려 나타난다. 이는 예수와 성령이 하나가 되셨음을 의미한다.
요단강은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출발점을 의미한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철철 넘치는 요단강을 건넌 뒤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가나안 정복을 향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이제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표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하늘이 갈라졌다’는 표현은 주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나타나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네가 하는 모든 일을 기뻐한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네가 순종할 것을 안다”는 확증을 보여주셨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 정체성을 심어주신 것이다. 예수는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강권적으로 광야로 몰아내셨다(12).
광야는 무엇을 상징할까? ① 하나님의 연단을 상징하고, ② 광야는 계시받는 곳이고, ③ 광야는 영적전쟁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 전에 연단을 받는다.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 속에 있는 나쁜 습관이나 잘못된 성격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광야를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안다.
광야를 계시받는 곳이라 함은 “광야에 있을 때에만 계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광야는 영적 전쟁의 의미를 지닌다.
광야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마가복음에서는 간단하게 기록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는 40일동안 금식하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구약에서 ‘광야’는 “들짐승과 뱀과 전갈이 도사리는 곳, 즉,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를 광야로 보내셔서 시험받게 하셨을까? 2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① 사탄과의 싸움은 예수께서 하실 사역의 방향에 대한 밑그림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예수의 전체 사역은 사탄과의 끊임없는 전쟁이었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사탄에 대한 승리였다.
예수께서 행하실 사역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사탄과의 싸움을 하시고 승리하셨다.
②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죄의 용서가 필요한 백성들과 동일시하신 것처럼,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으로 마귀와 싸우고 시험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오늘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당하신 3가지 시험의 내용은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우리 모두가 늘 당하는 시험들을 당하셨으나 말씀으로 이기셨다.
경북 예천에 가면 자기 재산을 갖고 세금도 내는 ‘부자나무’라는 별명을 가진 “석송령”이라는 소나무가 있다. 1927년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본인소유의 토지 약1,191평(현재 1890평)을 상속해주어 세금을 낸다.
1982년 문화재지정당시 조사된 내용에 따르면 약 600여년전에 큰 홍수가 나서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마을 사람들이 건져서 심었는데, 나무가 소유한 토지 임대료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마을 학생들 장학금도 준다.
소나무의 높이는 11m 이고, 줄기둘레는 4.2m이고, 그늘의 면적은 약 325평(1,071㎡)정도 된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보호를 위해 철책을 둘렀지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무그늘에서 쉬었다.
우리 교회도 석송령의 그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쉼을 얻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안식일을 만드시고, 그날을 복된 날이라고 칭하셨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이 파괴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이 파괴된 그때부터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었다. 끊임없이 땀 흘리며 사는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늘 제자리 인생을 살고 있다. 하루를 마치고 나면 ‘뭘 위해서 이렇게 사는 것일까?’하는 회의감과 공허함이 찾아온다.
안식일의 주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는 “참된 안식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해 주셨다. 예수만이 안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예수는 친히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으셨다. 지금 생명의 길로 나오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부화되기 전 병아리는 알껍데기 속이 전부인줄 알고 산다. 그러나 때가 되어 껍질을 깨고 나오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 스스로를 둘러싼 껍질을 깨고 예수 안으로 들어갈 때,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요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 인생은 어둠의 세력에 내몰리든, 성령께 내몰리든 어느 쪽으로든 내몰리게 된다. 성도들은 성령께 내몰리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욕망과 욕심을 자극하는 사탄이 아니라 성령께 이끌림 받는 삶을 살자.
광야는 어떤 곳일까? 낮에는 살인적인 햇볕이 내리쬐고, 밤에는 살을 에는 추위가 몰아치는 곳이다. 밤낮의 기온 차이가 50도 이상 벌어지는 사람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셨다.
그러면 우리가 내몰린 광야는 어디일까? 우리의 삶의 현장이 광야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받고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다보면 교회가 천국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교회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면 눈앞에 치열한 영적 전쟁과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광야 한복판에 세워진 쉼터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느냐? 사탄의 세력이 승리하느냐? 날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진다.
성경에서 ‘430’이라는 숫자는 고난, 시련, 인내를 거쳐 온전히 성숙해지는 시간을 상징한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머문 시간이 40일이었고,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도 40년이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주친 첫 번째 시험은 빵의 문제였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약점을 공격한다. 이성에 약하고, 돈에 약하고, 명예와 권력에 약하면 각 사람이 지닌 연약함을 공격 포인트로 삼는다.
예수는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뿌리쳤다. 예수의 공생애는 시험으로 시작해서 시험으로 끝났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바보처럼 사는 것이 승리하는 삶이다. 맞서서 힘으로 누르면 세상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세상은 설득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세상을 항복 시킬 방법이 없다.
지식과 논리의 힘으로는 복음을 증명할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말씀으로 이기셨다.
사탄의 시험을 피하는 방법은 2가지이다. ① 아예 사탄과 같은 편이 되는 방법, ②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는 방법이다. 성령께 이끌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사탄의 시험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끊임없이 시험과 마주치는 인생을 사셨다.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와 축복을 기대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미국 앨라바마 주에 ‘엔터프라이즈’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은 목화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해부터인가 목화에 벌레가 끼기 시작하더니 급속도로 퍼져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이참에 목화 농사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농사를 지어보자는 결론으로 땅콩을 기르기 시작했다. 땅콩 농사는 병충해에도 강하고, 마을 토질도 잘 맞아서 목화 농사보다 수익이 배가 되었다.
훗날 마을 사람들은 목화 벌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을 입구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시험이 곧 감사의 이유가 된 것이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오는 행복이 있다. 천사가 어떻게 수종들었는 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히1:14에보면, 천사의 사명 중에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 로뎀 나무 아래의 엘리야도 천사에 의해 수종받을 때 먹을 것을 공급받았다(왕상19:5).
광야 시험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실낙원인 ‘광야’를 복낙원으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첫째 사람 아담은 아름답고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함으로 황폐한 광야를 물려주었는데, 둘째 사람 예수는 살기 좋은 낙원이 아니라 거칠고 황폐한 광야에서 순종함으로 낙원으로 만들었다.
불순종함으로 낙원을 광야로 바꾸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순종함으로 거친 광야조차도 낙원으로 바꾸는 신앙의 삶을 사는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