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을 탐하는 모든 길의 종착역(잠1:10~19)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그것도 일반적 성공 비결이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성공 원칙과 실천을 통해 “성공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을 갈망한다.
성공하는 사람과 보통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공한 사람은 가까운 일부터 차근차근 하면서 푯대를 향해 끝까지 간다. 보통 사람은 가까운 일을 소홀히 하고 먼 이야기만 하다가 중도에 포기해 버린다.
성공한 사람은 가슴 뛰는 심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보통 사람은 계산을 하면서 마지못해 일한다. 성공한 사람은 믿음의 확신과 자신감으로 활력 있게 살지만 보통 사람은 ‘오늘도 무사히’에 만족한다.
성공한 사람은 돈에서 자유롭고 소신 있게 행동하지만 보통 사람은 돈의 족쇄에 묶여 바쁘게 사는 사람이다. 성공한 사람은 실패를 기회로 삼지만 보통사람은 실패로 좌절하고 남 탓을 하는 사람이다.
실패와 성공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후에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실패는 또 다른 성공의 관문으로서 성공의 가능성을 높인다. 따라서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성공이야 말로 값진 것이다. 실패를 통하지 않는 성공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유명한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삼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성공한 모든 사람은 실패를 경험했지만, 결코 자신을 실패자로 간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역경과 거절과 실패에 직면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믿고, 결코 실패자로 여기지 않았다.
“공무원의 퇴직금은 사기꾼의 호주머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말이 있다. 퇴직금이 있는 것 을 어떻게 알까? 가까운 친구들 때문에 알고 그 친구를 통해서 접근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친구로 인해서 실패를 보는 것이 2/3라는 말이 있다. 나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가 나를 배반하는 것이 치명적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삶을 살아가는 태도는 훈계를 듣고 법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지식과 지혜”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인생을 올바르게 살고 잘 사는 비결은 “하늘의 지혜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하늘의 지혜로 살지 않으면 심판 날에 견딜 수 없다.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약1:5).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려고 하다가 심판 날을 견딜 수 없다.
옛날에 돈을 목적으로 부잣집 아이를 유괴했고, 유괴한 즉시 아이를 죽이고 자루에 넣어 저수지에 가라앉게 했다.
그들이 잡힌 후에, ‘아이를 키우는 부부인데, 잡힐 줄을 모르고 그렇게 끔찍한 일을 했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 때에는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고 했다.
“욕심을 품으면 어리석음이 하늘을 찌른다”는 말을 실감하게 만든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했으며, 디모데에게는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했다.
‘핸드릭슨’ 주석을 보면, “탐욕을 대표하는 인간의 정욕을 쾌락과 권력과 소유욕, 세 가지”로 나누었다.
① 쾌락은 육신적인 욕구충족을 위한 무절제한 욕망이고, ② 권력은 나타내 보이고 싶은 욕망과 남을 다스리고 싶은 욕망이고, ③ 소유욕은 물질을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욕심이라고 했다.
하나님 백성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나오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살 때 구별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약한 자가 살아남으려고 하면 스스로 강해지든지 아니면 약한 데 수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생존방식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동물적인 생존 방식을 버리고 식물적인 생존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동물적인 생존 방식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으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식물적인 생존 방식은 다른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오히려 신앙적인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식물적인 생존방식은 대단히 위험한 약점을 노출시킨다. 우리가 스스로 살기 위해 남을 공격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
잠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제로 하고 가르친 내용이다.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두 길이 있다는 것이다.
잠언이 제시하는 두 길은 ① 지혜의 길이고, ② 악하고 미련한 길이다. 잠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지혜의 길이 있고, 망하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자기가 듣기 싫어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고 암송할지라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잠언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악한 자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10~12).
‘아들아’는 “원래 아직 인격적으로 가치관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말한다. 그러나 모든 믿는 사람들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고, 특히 초신자들을 “아이들”이라고 지칭한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10)’고 하셨다. ‘악한 자들’은 숨어 있다가 물건을 빼앗는 폭력배를 생각하기 쉽다. 누구든지 나쁘다는 것을 알 정도면 미혹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힘이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누구든지 힘있는 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런 길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유혹한다기보다는 사회현실이 유혹하고, 우리가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악한 길로 가려고 하는 것은 사회 자체가 사람들을 그런 길로 이끌고 있고, 사람의 본성도 그 길을 가려고 한다.
악한 자들은 맹수들이 하는 것처럼 가만히 엎드려서 전혀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다가 갑자기 덤벼들어서 물어 죽인다. 맹수들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한다.
약한 짐승들은 살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지만 육식동물들은 더 악착같이 달려가서 물어뜯어 죽이려고 한다.
육식동물들이 실컷 먹고 남은 것은 또 다른 육식 동물들이 와서 먹는다. 즉, 사자가 먹고 남은 것을 하이에나나 들개들이 뜯어 먹고, 또 나머지는 독수리들이 뜯어먹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는 힘이 있고 똑똑한 자들이 거의 대부분의 좋은 것들을 다 차지한다. 정부의 좋은 자리들은 고시출신이나 엘리트 출신들이 차지하고, 돈 버는 것도 성공한 소수의 것이다.
세상에서 좋은 것들은 성공한 소수들이 다 차지하고 그 후에 남은 것들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경쟁을 벌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마음씨가 좋다든지 혹은 인격이 훌륭하다는 것은 참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이 세상은 마음씨가 좀 나쁘고 인격적으로 부족해도 실력이 있고 성공한 사람들이 인정받는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목적은 자기 집을 돈으로 채우고, 물건으로 채우는 것이다(13). 그 대신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거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세상은 스펙이 좋고 똑똑한 사람을 볼 때 성공할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신에 마음씨가 좋고 인격만 훌륭한 사람들 볼 때는 성공보다는 이용당하기 쉬운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그 사람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여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 돈을 벌면 만족할 것 같은데 한계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길을 가지고 해도 가지 말라고 말씀한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은 풍성한 삶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을 통해서 야생동물의 길, 맹수의 길을 걷지 말라고 하신다. 사자가 사슴이나 노루를 잡아먹는 것을 보면 강한 맹수가 부러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슴이나 노루가 없어지면 사자는 굶어죽게 된다. 어떤 사자는 죽은 짐승의 시체를 뜯어 먹다가 병에 걸려서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제비를 뽑고 공동의 전대를 둔다는 것은 돈을 네 것이나 내 것 구별 없이 같이 쓰자는 것이다(14). 강한 자들은 그만큼 우리를 믿는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들이 주는 것은 먹고 남은 찌꺼기이다.
강한 자들은 절대로 약한 자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 강한 자들은 말로는 공평하게 한다고 말하지만 자기들 계산 방식의 공평인 것이다. 그들 방식의 공평은 좋은 것을 독차지한다.
강한 자들이 모든 좋은 것을 다 차지하고 별 볼일 없는 것을 나누어주면서 생색을 내는 것이 강한 자들의 공평인 것이다.
15~16절은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단정하지 못하고 불량한 아이들과 아울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이 세상 전체가 동물적인 생활방식이 지배하는 세상이기에 그러한 길로 가지 말고, 식물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다.
세상은 “머리가 똑똑하고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모든 좋은 것을 다 차지하는 곳”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좋은 것을 차지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공격해서 승리를 쟁취하려고 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목표를 갈망했는데,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전력을 기울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냥 성경 들고 교회 오는 것이 아니고, 동물적인 생활방식이 식물적인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늑대나 이리 같은 맹수가 아니라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이 되었다. 양이기에 세상에서 경쟁을 이길 수 없다.
야생동물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고 양으로 변화된 이후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목자가 인도하셔야 한다.
예수를 믿고 식물이 되어 버렸다. 이제 우리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과 싸우지도 못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나무가 되었다. 그러나 보통 나무가 아니라 열매 맺는 나무가 된 것이다.
17~19절에는 새의 비유가 나오는데 새는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물이 보이면 거기에 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바보 같은 초식동물이라도 사자나 맹수들이 엎드린 곳에 가까이하지 않는다.
초식동물들이 알면서는 맹수들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기 때문에 맹수들은 더더욱 다른 짐승들을 속여야 하고 사나워져야 한다.
맹수들도 초식동물들이 많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초식동물들이 없으면 결국 자기들끼리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물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어떤 지역에 표범들의 수가 현저하게 줄었는데 그 이유를 알아보니까 다른 짐승들이 없어서 굶어 죽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 세상은 맹수들만 으르렁거리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멧돼지의 천적이 없어서 무한정으로 개체수가 늘어나서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상황이 되었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생태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법으로 금지된 멧돼지 사냥을 풀어서 멧돼지 사냥을 허용해주면, 멧돼지는 한반도에서 멸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셔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욕심대로 살면 하나님은 복을 주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비참해지지 않을 수 없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시1:1).
새들은 약삭빨라서 자신들을 잡기 위해 쳐놓은 그물을 보면 피한다는 것이다. 새들은 그물이 쳐진 것을 알면 피하는데 악한 자들은 그물이 쳐진 것을 알고도 들어간다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해하기 위해 교활함을 보이지만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피와 생명을 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악한 자들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무죄한 자들의 생명을 해하려는 행동은 결국 자신들이 멸망을 초래하게 될 것을 경고한다.
불의한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려는 인간의 욕심은 결국 그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