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1:24~31)
에스겔 31장에 가면 애굽이라는 나무와 앗수르라는 나무를 물이 길렀다고 증언한다(겔31:4). 애굽 나무는 아주 오래된 고목이면서 큰 나무였고, 앗수르 나무는 아주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높이 자란 나무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애굽과 앗수르 스타일의 성공을 원한다. 앗수르형 성공은 고도로 급성장해서 다른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공한 실력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애굽 스타일은 고시에 합격하여 관료 집단에서 철밥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앗수르는 폭력을 수단으로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해버렸다. 적어도 힘으로는 앗수르를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무한정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앗수르적인 야망은 남의 행복을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야망은 세계 역사속에 알렉산더라든지 나폴레옹이라든지 히틀러 같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났고, 지금은 푸틴과 시진핑 등이다.
앗수르형의 성공이 브레이크가 없는 최고급 엔진이라면 성령의 사람들은 욕망의 브레이크가 너무 잘 듣는 엔진을 사모하라.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액을 먹으며 성장하는 생명나무이다. 에덴에 심겨진 나무라 할지라도 세상의 진액을 먹을수록 말씀의 요구는 부담스럽고 세상은 보암직하다.
우리 인생이 누릴 수 있는 복 중의 복은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완전하게 이루어지어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이 창조의 회복인 것이다.
교향곡을 들으면 그 음악에 절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곡가나 연주자는 그 절정에서 자신의 온 힘과 정열을 다 쏟아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온 천지를 창조하시는 데에도 절정이 있었다. 하나님의 온갖 지혜와 능력과 신성을 다 쏟아서 만들어 낸, 창조의 극치를 이루는 부분이 인간의 창조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극치요 절정이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는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이 정도로 소중하게 표현하는 데가 없다. 인간은 단순히 성실하게 맡겨진 일하고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치있는 것들을 많이 가졌든지 가지지 못했든지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도 극치요 절정이다.
하나님께서 혼신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쏟아서 만드신 작품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하루 밥이나 먹고 돈이나 버는 데 만족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원래의 존귀한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는데 특별한 점 3가지가 등장한다. ① 다른 피조물을 만드실 때와 달리 하나님 안에 의논이 있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의논하셨다.
다른 피조물을 만드실 때에는 그냥 만드셨는데, 유독 사람을 만드실 때에만 어떻게 만들며, 어떤 지위를 줄 것인지 의논하셨다.
②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다는 것이 창조의 절정이고 인간의 가치이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③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고기나 공중의 새나 땅에 있는 모든 육축이나 기는 것들을 사람이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지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천사와 의논하지 않으셨다. 천사들은 사람을 창조하는 일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이것은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의논이셨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런데 창세기의 시작부터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부르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놀라운 점은 설사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라도 수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창세기 처음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과 정면으로 충돌했으나 그들은 ‘우리’를 ‘나’로 바꾸지 않고, 더 밝은 진리의 빛이 비출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 가운데 우리를 초청하여 영원히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셨다.
단순히 좋은 밥이나 먹고 자식이나 잘 키우고 사업장과 직장에서 인정받으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우리를 초청하여 그 영광을 맛보고 나누고 그 안에 거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으로 충분하시고, 천사나 다른 피조물이 하나도 없어도 하나님은 외롭지 않으시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영광의 교제에, 그 기쁨의 만남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고 그 영광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기 전에 사람이 범죄할 것을 아셨다.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성자께서 책임지기로 언약하셨다. 그리고 독생자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오늘 본문에서는 거기까지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셨고, 특별한 지위를 주셨다는 것만 밝히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결정들을 미주알고주알 밝히지 않는다.
창세기는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 의논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삼위 하나님의 의논이 단순히 우리를 어떻게 만들고 어떤 지위를 주느냐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범죄에 대한 책임과 궁극적으로 어떤 영광 가운데 우리를 초청해서 어떤 기쁨으로 교제할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논이 있은 후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붙잡은 것은 말씀이 아니라 기적이었고, 예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26)’에서 “형상은 하나님의 내면적인 모습”이고, “모양은 하나님의 외면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이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의지를 포함한 인격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인격을 가진 존재, 알고 느끼고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존재, 사랑할 수 있고,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인격 속에 머물다가 우리 삶에 행위적인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모양”인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 의지적인 말과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모양”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하나님을 원형 삼아서, 즉 하나님을 모델로 해서 창조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생각하는 것이 늘 악하게 되었고 말과 행동은 파괴적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인간에게서 창조시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것을 아셨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이시기로 결정하셨다.
삼위 하나님의 결정대로 독생자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께서 보혈을 흘리신 목적은 죄로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다.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마22:20)”고 물으셨고,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화의 핵심은 화폐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지금 누구의 소유인지를 묻고 있는 가르침인 것이다. 드라크마에 가이사의 형상을 새겨 놓은 것은 ‘가이사의 소유’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가이사의 것으로 사는 사람들은 물질이, 권력이, 출세와 성공이 자신의 주인이다.
가이사의 형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사람은 이용가치와 수단에 불과하다. 사람을 사랑의 대상이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고. 착취하고,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가이사의 형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이용가치가 있으면 사람 대접을 해주지만 더 이상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쓰레기처럼 버린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창조 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믿는 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
지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답게 믿음으로 세상과 죄를 이기고, 나 자신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얼굴을 볼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 삶을 거룩하고 존귀하게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예수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얼굴에서 마귀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얼굴에서 죄가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얼굴을 보면 예수를 발견하고 천국을 발견할 수 있는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제일 미련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 앞에서 거만 떠는 사람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곧바로 행하신 것은 사람을 축복하는 일이었다(28).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영광스러움과 존귀함이 유지되도록 축복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구체적인 축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위임 명령을 하신 것이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유지되도록 다스리는 축복을 사람이 받게 된 것이다.
‘다스리다(히, 라다)'는 말은 “① 소극적인 의미는 ’다른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스린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굴복당하지 않는 당당한 자존감을 의미한다.
예수의 삶은 그 어느 것에도 정복되지 않는 삶이었다. 성난 물결과 바람도 예수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가난도, 외로움도, 궁핍도, 굶주림도, 심지어 죽음의 공포마저도 예수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복주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라는 것은 이렇게 그 어떤 것에도 지배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② 적극적인 의미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장악해서 바른 위치에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질서를 어기고 자신의 영역을 이탈하는 것들을 원상복귀 시키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학문은 사람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학문이 사람을 지배하면 안된다. 인터넷이나 TV도 사람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데, 세상의 정보가 사람을 억압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에게 주셨다는 했다(20). 이것은 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할 뿐 아니라 남녀의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는 남자로, 여자는 여자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양성 평등’과 ‘성평등’은 완전히 다른 뜻이다. ‘양성 평등’은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뜻하는 것이지만, ‘성평등’은 “모든 개인적 성적 취향과 내가 선택한 성은 누구도 판단받지 않고 평등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성을 남용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결혼은 성의 결합에 대한 사회적인 승인이기에 결혼 이외의 방법으로 성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소돔의 멸망은 동성애에 대한 심판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시고 그 많은 인간들을 홍수로 멸망시켰을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죄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땅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의롭고 사랑에 충만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온 땅을 뒤덮기를 바라셨다.
단순히 사람만 많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많아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 그런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고,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다스리는 것을 하나님은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채소와 풀을 양식을 주셨다(29~30).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먹을 것과 동물이 먹을 것을 처음부터 구별함으로써 먹이를 가지고 다투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자발적인 경배와 순종을 원하셨기에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다. 죄의 유혹이 만연된 세상 속에 살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이 살아나지 못하도록 쳐 복종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소감은 “좋아더라(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었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는 특별한 감탄을 하셨다. 이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감탄하도록 하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