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체는 땅을 비추고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창1:14~23)
초대교회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의 일화가 있었다. 그의 제자가 주를 보여 주면 주를 믿겠다고 하자 크리소스톰은 제자에게 태양을 10분만 쳐다본다면 하나님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이 발하는 빛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데 모든 창조의 근원인 빛을 사람이 바라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살기를 원하셨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는 것이 사람이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 경험하지 못한 것은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특별한 기적 때문이 아니라 날마다 일상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송과 경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창세기의 수신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속에서도 예배자로 살아가기보다는 자신들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데 하나님을 이용한 삶을 살았다.
어렵고 힘든 광야에서 예배자의 삶을 살지 못한 결과 가나안에 들어가자 하나님을 버리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바알을 선택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실패한 이유가 무엇일까? 광야에서 음식을 내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았으나 가나안에서는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먹고 살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추수한 농산물만 바라보았지, 농사가 가능하도록 햇빛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자연 재해로부터 지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다.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도 노력한 결과이고 내가 똑똑해서 얻은 열매라고 생각한다면, 다를 것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있을 때보다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더 많이 기도해야 했고, 더 깊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했다.
그 이유는 가나안 땅의 축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을 가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 것이다.
가난하고 힘들 때보다는 풍요롭고 모든 것이 형통할 때 더 많이 하나님을 찾고 간구해야 한다. 직장이 없을 때보다 직장이 생겼을 때 그 직장에 취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첫째 날 창조하신 ‘영광의 빛’이 있음에도 넷째 날 물리적인 빛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광명체를 창조하시고 영광의 빛을 숨기신 이유는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는 특별은총인 영광의 빛을 체험하게 하시고, 만나와 반석에서 솟아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에는 일반적인 은혜로 살아가게 하셨으나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체험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고,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발하시는 빛을 체험했다.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은 예수께서 발하시는 빛 때문에 사흘간 눈이 멀어 세상을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직접적으로 보는 모든 사람은 모두 눈이 멀 것이며 살아갈 수 없다.
바울은 영광의 빛을 예수의 얼굴에 두신 하나님이 택함 받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다고 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사도 바울은 예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아는 마음을 우리에게도 비추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성령과 말씀이 충만하면 예수의 영광의 빛이 우리에게도 비추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살아가면 그 사람의 얼굴빛이 달라진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주께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마음속에 근심이 사라지고 주의 평안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다보니 그 얼굴이 빛나고 평안해 보이는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예수를 따르면 어두움의 세력이 쫓겨나게 되고 생명의 빛이 임하게 된다. 이 생명의 빛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어 어두움에 속했던 삶을 버리게 하며, 옛 생활, 옛 습관을 끊어 버리게 만든다.
예수를 따르므로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은 상태가 하나님이 창조를 보시고 말씀하셨던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우리의 심령에서 어두움이 물러가고 예수가 주시는 생명의 빛이 가득한 상태, 그 상태를 하나님은 좋아하신다.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을 하나님은 춤을 추며 기뻐하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빛과 어두움이 나누어지는 것을 이미 목격했다(출14: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구름 기둥도 옮겨가므로, 구름과 흑암이 있는 쪽과,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가까이 못했다.
빛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진영에는 평화와 기쁨과 기적이 있었고, 흑암에 갇혀 있던 애굽에는 두려움과 심판과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날’의 개념 속에 들어 있는 어두움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숨겨져 있었고 빛에는 구원과 은혜가 숨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라고 요청하는 표식이었다.
이렇게 빛과 어두움이 나누이는 장면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나누신 빛과 어두움을 바라보면서 ‘날’이라는 시간이 주는 은혜와 구원, 심판과 죽음의 경계를 날마다 확인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삶이 빛이신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심판받아 멸망받게 될 어두움에 속해 있는지를 날마다 살펴야 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도 자신의 삶에 무감각해져 그날이 또 그날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면 영적인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을 보면서 피조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빛의 자녀인 우리들은 어두움의 일을 사랑하거나 따라갈 수 없다. 예수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어두움이 아니라 빛의 자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두움의 일을 버리고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8~11)”
어두움은 오직 빛으로만 물리칠 수 있다. 빛이신 예수께로 나아와야 우리 삶 속에 있는 모든 어두움이 물러간다.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에는 더럽고 추한 일을 부끄러움도 모른 채 행하고 있었다.
빛으로 나아와서 빛되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어두움의 일은 빛을 창조하신 말씀의 능력에 의해 완전히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빛으로 충만하게 되기에 더 이상 어두움이 머물지 못한다. 모든 어두움의 권세는 빛 앞에서 사라지기에 나를 사로잡던 죄책감도, 열등감, 악한 습관과 욕구도 다 사라진다.
말씀과 성령의 빛 아래로 나아오면 어두움이 주관하던 모든 인생의 상처와 고통, 나를 지배하는 죄악의 사슬이 끊어진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어두움의 사슬에 매여 살아가고 있을 때 심령에 스며드는 말씀의 빛은 모든 어두움의 권세가 끊어진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확신도 평안도 자신감도 상실한 채로 패배자의 인생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특별은총, 영광의 빛은 “① 내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하며, ②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를 영원히 누리게 하며, ③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출10장에 보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출10:21)”는 명령에 의해 태양은 3일동안 흑암에 지배를 받으며 빛을 잃었지만, 또 다른 발광채의 빛이 이스라엘이 거주했던 고센 땅을 비추었다.
흑암 가운데서 또 다른 빛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태양 외에 또 다른 빛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물질적인 빛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의 얼굴에서 나오는 영광의 빛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예수의 빛은 “착한 행실”이라는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 즉 예수 닮은 삶을 통해서만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생명의 빛이 되는 유일한 길은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8)’는 말씀은 단순히 “창조가 잘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전체적인 계획과 목적대로 완전하게 일치한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생명의 빛을 체험한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인생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후에 광야를 통과하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성취하기 위함이다.
삶의 기준과 삶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애굽에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던 옛 습관을 버리고, 내 생각과 내 고집, 내 경험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앞에 서야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므로 거룩한 모습으로 서야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했음에도 변함없이 애굽의 영화와 육신의 평안함을 추구했다.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았지만 속사람은 세상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했다.
인간 중심, 욕구 중심의 신앙생활이 순간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었고, 원망과 불평불만으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인생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 즉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땅을 바라볼 때는 낙심, 절망, 원망, 불평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하늘을 바라볼 때 감사와 기쁨과 평안이 있다.
하나님은 물에게 명령하시기를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20)”고 하셨다. 마치 강과 바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 듣는 것처럼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 물에게 각종 생물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책임지고 지켜주며 보호해주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물에게는 많은 물고기들을 번식시킬 책임이 있었다. 만약 물이 오염되어 이상이 발생하면 물고기는 더 이상 물 속에서 살지 못하고 멸종할 수밖에 없다. 요즘 기후변화로 동해바다의 해수 온도가 올라가니까 명태와 오징어가 살지 못한다.
물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면서 자기 정화 능력을 발휘한다. 상류에서 누가 비누나 샴푸로 머리를 감았더라도 밑으로 내려오면서 물이 정화가 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바다나 강물은 물고기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보호하는 기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땅은 각종 푸른 채소와 짐승들이 살 수 있게 해주어야할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바다나 땅이나 하늘에 이런 명령을 주신 것은, 자연이 너무 변덕을 부려서 모든 생물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자연은 너무 변덕스러우면 안되고, 바다는 물고기가 살 수 있도록 늘 염도가 일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나 들짐승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까지 사랑하시고 지키신다(마6:2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난개발로 물과 땅과 하늘이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들고 있다. 창세기는 인간이 범죄하므로 땅이 현저하게 그 능력을 잃어버렸고, 불필요한 잡초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세상에 있는 많은 물고기나 땅의 짐승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신의 정욕을 억제하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땅이 황폐해지고, 바다가 물고기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양떼와 소떼를 돌보는 것이며 짐승들이 평안한 삶을 살게 만드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는 썰렁한 구석이 없다. 자연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약동을 한다. 하나님께서 많은 생물들을 만드신 것은 나 혼자만 살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수많은 이웃들이 함께 살도록 창조하셨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문제에만 빠지는 것이 “죄”이다. 도시화 현상으로 진정한 이웃이 없이 아주살벌하고 썰렁한 세상을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다와 땅에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실제로 그 명령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바다나 땅이나 하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는다. 하나님이 만드신 많은 생물은 우리의 이웃으로서 모두 행복할 권한이 있다. 노아의 방주가 비좁지만 함께 공존했다.
‘그 종류대로(21)’ 만드신 것은 “모든 생물에게 자기의 종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세상은 강한 자의 것이 아니고 약해도 살 권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