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창조와 나눔과 채움의 생명사역(창1:3~8)
「혼돈」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토후)에 보면 “무질서한 상태, 길이 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공허」(와보후)란 말은 “허무 하다, 허탈하다, 텅 비어있다”는 뜻이다. 「흑암」(호쉐크)이라는 말은 ‘어둡다’는 뜻도 있지만 “비참하다, 처참하다”는 뜻이다.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2)’는 말씀에서 「운행」은 “직접 친히 개입하셔서 운영하시고 진행하시고 친히 역사하신다”라는 뜻이다.
성령이 함께하시고 운행하며 역사 하시는 사람과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 아무리 육체가 잘 생기고 똑똑하고 경험 많고 환경이 좋아도 생명이 떠나면 ‘한 줌의 흙’일 뿐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패류도 생명이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생명이 떠나면 가치가 급격히 하락해 버린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우리의 삶과 재능과 물질을 성령이 운행하셔야 한다.
예수를 믿고 어떤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성령이 우리의 삶을 운행하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말씀했다.
중직자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성령이 운행하는 축복을 받기를 소원한다. 성령이 운행하실 때 혼돈과 공허의 땅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땅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시는 곳에는 빛된 일과 어두움의 일을 구별하게 된다(4). 많은 사람들이 축복과 저주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항상 성령의 지혜의 조명을 받아야 분별할 수 있다. 아름다운 꽃과 경치도 빛이 없으면 가치를 분별할 수 없다.
세상에서도 빛의 조명을 받아야 사리를 분별하고 방향과 색깔을 분별하듯이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만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할 수가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운행하셔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삶의 결과로 맺는 열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①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② 입술의 열매, ③ 전도의 열매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평판을 좋게 받는 것도 귀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에서 빛을 이야기할 때는 3가지 의미가 있다.
① 성경에서 빛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을 때 심령에 빛이 비취었다고 말한다.
② 도덕적인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는 것은 “도덕적으로 의롭고 정당하게 살 뿐 아니라 책임을 지는 존재로 살라”는 뜻이다.
③ 성경에서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불결한 것이나 추악한 것은 조금도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기쁨과 감사와 영광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첫날 창조하신 것은 ① 진리의 깨달음이나 ② 도덕적인 책임이나 ③ 영광을 의미하는 빛이 아니라 정말 눈에 보이는 빛이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더라’는 표현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에 잘 일치하여 모순과 갈등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어 서로 섞이지 못하게 하셨다. 빛은 빛이고 어둠은 어둠이었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어중간한 회색지대 상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하기 적전에 빛과 어둠의 분리를 목격했다. 빛과 어둠이 나뉘어서 빛에서 어둠으로 갈 수 없고 어둠에서 빛으로 올 수 없는 분명한 분리 현상을 목격했다.
흑암재앙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으나 애굽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홍해언덕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쁨과 소망과 승리가 있었으나, 분노와 혈기로 달려오던 애굽인들은 모두 빠져 죽었다. 홍해 언덕에서 분리된 빛과 어둠은 서로 합쳐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이 섞이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 빛이면 빛, 어둠이면 어둠, 명확하게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의 사람들은 빛과 어둠이 나뉘는 것보다는 중간을 좋아한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책임을 지거나 공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어두운 데서 밝은 데를 보는 것이고, 나는 감추어져 있고 남은 드러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완전히 구별해서 빛의 세계에 있으려면 어둠의 일을 완전히 버려야 하고, 만약 어둠에 속하려면 빛의 일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는 하나님의 기질과 맞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흑백논리이다. 흑백논리는 사람을 경직되게 하고 융통성 없게 만들지만 문제의 치료에는 흑백논리밖에 없다. 성경은 흑백논리로 진리를 증언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간 상태에 머물고 싶어했는데 하나님이 쪼개 버리셨다. 하나님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불로 완전히 나누시고, 홍해로 나눔으로써 계속 애굽을 동경하며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으셨다.
빛의 자녀가 아니면 어둠의 자녀이지 중간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나와 내 가족들의 영혼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는 것이다.
빛에 속한 빌의 자녀라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이다. 빛의 자녀들의 삶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기에 삶을 예수께 구체적으로 맡긴 사람들이다.
빛과 어둠이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은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고 단지 빛만 비추면 되기에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 때 성도들은 단순히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 괴롭히던 수많은 우상과 열등감, 수많은 습관과 선입관과 성경에 대한 곡해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 우리의 영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빛이 없는 곳은 단순히 어두운 곳이 아니라 거기에서는 반드시 어둠의 사자들이 날뛰게 되어 있다. 빛 없이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삶의 가치를 상실하며 죄책감에 빠지고 마음에 상처를 깊이 받은 상태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면 모든 어둠의 세력들이 싹 사라져 버린다. 열등감도, 죄책감도, 운명적인 사고방식도, 징크스도, 악한 습관들도 다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빛의 능력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깨달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를 얽매고 있는 좋지 못한 생각들과 여러 복잡한 것들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빛의 삶으로 담대히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힘과 결단을 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무거운 사슬을 몸에 칭칭 감고 살고 있지만 깨닫지 못한다. 오직 말씀의 빛으로 나아올 때 어둠이 뿌려놓은 모든 인생의 상처와 고통과 나를 지배하는 사슬들이 끊어진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올 때에도 잔뜩 쇠사슬을 감고 온다.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이 나를 지배해버리기에 담대할 수 없다.
생명의 말씀은 그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기뻐 뛰며 감사하게 만들고, 내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며, 어느 누구도 짓밟을 수 없는 내 속의 자유와 인격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든다.
심령에 생명의 말씀이 임한 사람은 끊을 것은 끊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공상을 즐기지 않는다. 되지도 않을 것을 붙들고 환상과 자기도취에 빠져서 방황하는 삶은 어둠이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둠의 냉기가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 있기에 더 많은 말씀의 빛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과거의 실패에 대한 죄책감과 운명적인 사고방식을 전부 끊어버려야 축복을 누린다.
단 하루를 살아도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태에서 살아야 빛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거두심으로 밤이 오게 하셨다(5).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부터 그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이다.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가 하루이든 밤 12시부터 다음날 12시까지가 하루이든. 하루에는 반드시 밤과 낮이 포함되어 있다.
요즘 사람들의 특징은 밤낮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고, 모든 학문을 다 습득할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한다. 자기의 한계를 깨달았다면 밤이 오면 잠을 자는 것이 창조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
창조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 대가가 아주 심각하다. 자기도 모르게 건강을 잃어버리고 뇌세포가 파괴되고 감정이 메말라간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밤과 낮을 주신 것은 “너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니까 네 자신을 잘 알아서 분별력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밤마다 우리의 한계를 깨달아야 하고,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짧은 낮 동안만 가치있게 살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한밤중에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무리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일할 수 없는 밤이 긴 것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스라엘이든지 우리든지 하루가 밤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는 훈련이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물과 공기와 식량”이다. 물은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너무 과하면 물에 빠져 죽고, 물이 너무 모자라면 갈증과 탈진으로 죽는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하게 살 때 홍수로 인류가 멸망 당했고, 엘리야 시대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하여 하늘이 3년 6개월동안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한국은 세계 물 부족 국가 중의 하나로 분류되어 있다. 물이 없어서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물은 많지만 마실 수 없는 물, 즉 오염되고 폐수가 된 썩은 물이 많아서 있으나 마나한 물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듯이 우리의 영혼은 영혼의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지 않고는 영이 죽어 버린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물과 물로 나뉘라(6)’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하나님이 물과 물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의 물을 위로 올리고 다른 하나의 물은 밑으로 내렸다. 물과 물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양쪽으로 밀어내니까 그곳에 공간이 생긴 것이다.
‘궁창(히, 라키아)’은 히브리어 「라카」에서 파생된 말로서 “확장된 공간”을 말한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다고 했다.
‘궁창 위의 물(7)’은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의 수단”을 상징한다. 하늘에서 비가 와야 사람과 식물과 모든 짐승들이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비처럼 내려주셔야 영혼이 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머리 위에 엄청나게 많은 물을 저장해 놓으셨다. 많은 물이 적당하게 내릴 때는 은혜가 되지만 그냥 쏟아지면 한꺼번에 죽을 수 밖에 없다. ‘궁창 위의 물’은 “대기층에 있는 수많은 수분”을 말하는데 때를 따라 비와 눈과 이슬과 우박을 내린다.
하나님은 궁창 위의 물을 조절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허락하신다. 우리는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매달아놓은 이 엄청난 양의 물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하신 것이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엄청나게 많은 물이 위에 있어서 사람의 몸에 해로운 자외선이나 광선들을 차단했기 때문에 사람의 수명이 길었다.
하늘 위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양식이 있었다는 창세기를 수신한 광야의 백성들이 체험했다. 하늘에서 비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양식도 내렸는데 만나는 40년간 내렸지만 바닥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흑암에 처한 세상에 첫째 날에는 빛을 창조하셔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고, 두 번째 날에는 궁창(하늘)이라는 공간을 만들어서 하늘 아래의 물과 하늘 위의 물로 나누셨다.
이렇게 나누는 것을 ‘분별’이라고 하고, 이렇게 나눌 수 있는 능력을 “분별력”이라고 한다. 혼돈의 상태는 분별력을 잃은 상태인데, 분별력을 잃은 사람의 삶은 혼돈에 빠지고 결국은 공허와 흑암에 처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이유는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한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목적은 분별하는 능력을 얻고자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