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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창조의 시작(창1:1~2)

  • 김낙주 기자
  • 입력 2026.04.2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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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창조의 시작(창1:1~2) 

 

창세기는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믿음을 붙들어주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신 선포의 말씀”이다.

 

창세기의 말씀을 최초로 받은 교회는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다신교의 나라였던 애굽에는 많은 신이 있었고, 주술과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있었다. 애굽은 하늘의 태양과 달을 섬겼고 바다와 강을 섬겼으며 심지어는 독사나 가축 같은 짐승들을 섬겼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0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영향을 받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고 살았다.

 

창세기는 애굽의 영향을 받았던 이스라엘에게 눈에 보이는 태양이나 땅은 신이 아니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만 유일신이라는 것이다.

 

창세기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창조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창세기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며 우리들의 신앙을 붙들어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

 

도미노 현상, 도미노 법칙이라는 것을 안다. ‘도미노 법칙’이란 “하나의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만 그 하나의 도미노가 쓰러진다면 다른 도미노들도 연달아 쓰러지는 법칙”을 말한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신앙이 기독교 세계관의 첫 번째 도미노에 해당한다. 창조 신앙이 쓰러지면 모든 기독교 세계관인 인간의 타락,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예수의 재림까지 다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첫 단추이다. 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기독교 세계관의 첫 번째 도미노가 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의 기록 목적과 시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창세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즉 광야교회 성도를 위해 하나님이 모세를 성령으로 감동하사 기록하게 하셨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지,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인지,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이다.

 

척박한 광야에서 미래가 불확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세기를 통해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할 이유(언약)와 목적을 분명히 했다.

 

하나님은 척박한 광야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제공해 주셨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토라)을 주신 것이다.

 

가나안이라는 비전의 땅을 향해 힘든 광야에서 연단받는 그들에게 필요했던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보호의 증표로 율법이 주어졌음에도 광야의 이스라엘은 아직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

 

광야에 갇힌 것 같은 이스라엘은 ①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②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 광야로 불러내셔서 이런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일까? ③ 왜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가?

 

광야의 이스라엘은 마치 영적으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았다(2). 하나님이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을 아시고 창세기 말씀을 주신 것이다.

마치 태초에 땅이 혼돈, 공허, 흑암 속에 있을 때 빛을 비추어 주신 것처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길을 걷을 수 있도록 말씀으로 그 앞길을 비추어 주셨다.

 

우리 성도들은 인생의 혹독한 광야 길을 걷는 분도 계시고, 우리 교회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길을 걷기에 창세기가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면, ① 우리 앞을 가로막는 홍해도 갈라지고, ② 인생 앞에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를 것이며, ③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을 체험한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한다면 삶의 현장에서 온갖 기적을 체험하고, 세상에서 온전한 예배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인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온전히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오합지졸과 같았던 광야의 이스라엘은 혹독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

 

똑같은 광야에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원망과 불평만 했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출애굽 1세대 사람들 가운데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언약의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아브라함을 통해 기초를 놓은 하나님의 꿈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꿈을 성취시키라고 선택받은 민족, 즉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척박하고 혹독한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에게 창세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1~11장), 자신들이 누구인지(12장 이후)를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창세기는 불확실한 상황과 혹독한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떠한 혹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예배하라”는 것이다(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이 바뀌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귀신에서 벗어나 오직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은 충격이었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400년간을 지내는 동안에 자신들도 모르게 우상 문화에 찌들어 살아왔다. 다신교의 나라 애굽에는 수많은 신이 있었고, 주술과 우상 숭배가 그들의 일상이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내리신 10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만큼 애굽은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나라이며,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그 영향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지금까지 신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창조주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훈련과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주인되심을 선언하는 말씀”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 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통해 잘못된 신관에서 벗어나 창조주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자들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무려 32회나 등장한다. 모든 창조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마치 자신인 줄 알고 행동한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내가 인생의 중심이 되었을 때 모든 인생의 불행이 일어난다. 나를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한다.

 

인생의 모든 불행은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할 때 일어난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결정할 때 인생은 행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대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탄이 모든 사람을 유혹할 때 “하나님 중심의 원리를 벗어나라, 너도 하나님처럼 되어서 만물의 중심이 되라”고 외친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보다 더 가지게 되면(권력과 지위가 올라가고, 부자가 되면)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본능이 발동한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하나님처럼 되어 다른 사람을 다스리니 하나님을 인정할 리가 없다.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만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부합한 인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면 나도 행복하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도 행복해진다.

 

‘창조’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가 두 가지인데, ① ‘바라’이고, ② ‘바나’이다. ‘바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고, ‘바나’는 원래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을 때 쓰인 단어가 ‘바나’인데, 원래 존재 상태인 뼈에서 하와가 창조된 것이다. 창1:1절에는 ‘바라(무에서 유를 창조시는 것)’라는 단어가 쓰였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통해 인류 역사에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시고,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과 교제하시는 공간을 에덴으로 정하셨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에덴, 교회, 심령)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했는데, ‘세월을 아끼라’는 뜻은 “기회를 사라, 시간을 구원하라”는 뜻이다.

 

태초에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창조된 시간을 허락받은 우리는 시간을 구원하여 새롭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과 함께 교제할 때 부족함이 없는 기쁨과 풍요의 동산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은혜와 능력 안에서 시간을 구원하는 자요, 심히 좋은 공간을 만드는 자이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죄를 이야기해 주고, 죄의 결과를 이야기해 준다. 사람을 해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이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는 것은 “예배드리지 않고 봉사하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라 듣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창세기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이 죄이고, 주관적인 확신에 빠지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창세기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은 말씀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창세기 후반부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실례를 들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는 “진짜 사는 길은 애굽과 소돔과 고모라에서 잘 먹고 잘 사는 풍성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갈등하며, 말씀과 함께 방황하며 끝없이 나그네처럼 지내는 것”이 사는 길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말씀과 함께 방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믿음은 삶 그 자체였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믿음과 삶이 분리된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 없고, 믿음은 곧 삶이었다.

 

창세기는 말씀을 붙들고 끝없이 방황하면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세상에서 번창하는 것보다 훨씬 복되다는 것을 생생한 언어로 보여준다.

 

세상을 믿고 산 사람들과 세상에 있는 땅을 의지한 사람들은 모두 멸망했지만 말씀을 붙들고 순종한 사람들은 오늘도 살아있다고 성경은 외친다.

 

예수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신 부분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도 살아있다”고 말씀하셨다.

 

‘땅이 혼돈하고(2)’라는 것은 “땅에는 어떤 형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의 땅에는 흙도 있고 바위도 있고 산도 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명확한 구분이 없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예를들어, 홍수가 나서 범람을 하면 어디가 집이고 어디가 길이며 어디가 논이고 어디가 밭인지, 집과 화장실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

 

‘공허하다(2)’는 것은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가 하나도 없는 것, 형태가 없고 질서가 없이 모든 것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는 해석하기 아주 어려운 말씀이다. ‘흑암’은 어둠인데, ‘깊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해석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신다’는 말씀을 보면, 아마도 ‘깊음’은 끝없는 수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해석한다.

 

동굴을 탐사하는 분들이 동굴 속의 호수를 발견하면 동굴 속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동굴 속에는 빛은 전혀 없고 끝없는 깊음만 있는 것이다. 끝없는 깊은 어둠이 지구를 덮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끝없는 혼돈과 공허 속에 있었던 세상을 질서 있게 정돈하시고 많은 생물들이 살게 하신 목적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백성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천사와 달리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복된 백성을 만들기 위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며 어디에 애착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사는 지구의 최초의 황량하고 쓸쓸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세상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세상이 주는 달콤한 맛에 집착하고 매달린다면 세상과 함께 버려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창세기의 시작부터 말씀하시고, 그 후에 노아 홍수와 소돔의 역사를 통해서 재차 강조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세상이 주는 직책이나 살고 있는 집의 평수가 아니다. 말씀과 은혜를 깨닫고 살고 있는 삶의 질이 중요하다.

 

2절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은 “이처럼 황량하고 무의미한 곳에 하나님의 영(루아흐, 바람)이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존재하고 있는 땅을 움직이시고 계속적으로 붙들고 계신상태를 ‘운행하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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